곧 집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들떠 있든 포로들이 점점 희미해지는 고향길을 더듬다가 처진 어깨와 떨어지는 고개를 가누고,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철조망 주위만 서성일 뿐이다. 이따금 찬바람을 몰고 오는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양손으로 양 귓바퀴 비비는,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작업장으로의 인솔도 뜸하고 부둣가의 작업은 아예 끊겨 버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망 대문 두 쪽이 풍구질하듯 여닫히더니 언제부터인가 굳게 닫히고 말았다. 먹을 것, 아니 ‘비료 원료’를 실은 트럭이 이따금 드나들고, 거대한 ‘비료공장’에서 생산한 ‘유기질 비료’ 통을 멘 포로행렬이 길게 늘어서서 움직일 뿐이다. 행렬은 ‘M.P’ 글자를 하얗게 새겨 넣은 철모를 깊숙이 눌러쓴 정문 지기 미군의 빨간 코에 그의 손을 올리게 향을 피우면서 느릿하게, 마치 시위라도 하는 양, 아주 느리게 움직여 나간다. 미군 정문 보초와 작업반 인솔 미군 간에 한바탕 고함이 오간다. 그러더니 우리만의 전용(專用) 특허인 ‘빨리빨리’가 언제 그들에게 전이(轉移)됐는지, ‘허바허바’를 연발한다. 그들도 작업장에서의 느린 동작은 참아 주지만 이 ‘유기질 비료’의 이동자취와 향내는 참을 수 없나 보다. 비뚤어진 포로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응당 앞뒤 사람이 발을 맞추어야 출렁이지 않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보조를 어긋나게 뛰면서 향수를 정문에 주르르 흐르게 한다. 또 한바탕 말씨름이 일더니 결국 화는 포로들에게 돌아온다. ‘가아뎀!(제기랄)’, 알아들을 수 없는 지껄임에도 뜻은 통한다.
두 동강 난 드럼통에 담긴 포로들의 배설물로 해서 수용소 정문이 떠들썩하게 햇살을 받았다. 이 햇살은 아무리 따셔도 철망 속에 갇혀 오매불망 부모 형제를 그리다 식어 오그라드는 우리의 마음과 몸을 녹일 수가 없다.
정문 안에 아침마다 줄지어 앉아 있던 누룽지 보상 사역 자원자도 보이질 않는다. 작업은 고작해야 수용소 안의 정리 작업뿐이다.
이윽고 구름이 덮치고 공기가 싸늘하게 식고 있다. 찬 기운이 계절적 북풍과 아우르면서 텐트의 옆 포장을 치며 북소리 지른다. 풍… 터터덕…, 들어왔든 바람이 통로의 포장문을 열고 빠져나간다. 남아있던 바람이 바닥 통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그나마 붙어 있는 포로들의 온기를 찾아서 제가끔 가랑이 새로 스며든다. 어깨를 움츠리고, 다리를 꼬고 있어도 목은 자꾸만 움츠러든다. 텐트는 팽만 됐다가 찌그러지듯 졸아 들이기 반복한다.
이 거센 바람이 우리를 떠서 어디에다 내팽개칠지, 이 바람이 우리의 소망인 고향길을 가로막지나 않는지, 희망은 절정의 고비를 넘어서 이제 서서히 의문의 울안으로 갇히고 있다.
어떻게 될 것인가!
에고는 없다. 그 실, 포로에게 예고함은 폭동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리라. 그럴지도 모른다. 아침밥을 먹자마자 호루라기 소리가 하늘을 덮는다. 모포를 받은 사람은 모포를, 침낭을 받은 사람은 그 침낭을 들고 정문으로 내몰리고 있다. 소지품이 있을 리 없지만, 이들의 생각은 입고 있는 옷 주머니 속이면 충분하리란 생각에서다. 군사작전의 일환임으로 일체가 비밀이고 신속해야 할 터인즉 그들의 훈련에 우리는 한낱 군수품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 전 재산(?)인 모포 한 장을 들고 다섯 사람씩 옆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돼지 새끼 세듯, 마른 명태 꾸러미 세듯 세이며 정문을 빠져나가 대기 중인 트럭에 실렸다.
자, 이젠 어떻게 되지? 잡힐 때의 공포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트럭 위의 경비병 ‘국방군’ 아저씨도 모른단다. ‘보이스카우트?’ ‘영어 공부?’ 일순에 거덜 났다. 내 고향행의 꿈을 알알이 엮었든 ‘텐트 실장갑과 양말’도 정문에서의 소지품 검사에 몽땅 털렸다. 그들이 용인하는 것은 담배와 먹을 것뿐, 일체 다른 것은 불법 소지다. 정문 옆엔 포로들의 꿈이 서린 소지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이 소지품 압수와 함께 고향의 꿈도 압수당했고 이는 새로운 시련이 시작됨을 예감할 수 있는 징후였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부려진 짐, 포로들은 또 옆으로 다섯 사람씩 줄지어 쪼그려 앉아야 했다. 아가리를 벌린 여러 척의 배가 새롭고 신기하기도 하지만 넘보는 저 배의 커다란 입이 우리를 몽땅 삼킬 것 같아서 겁난다. 포로들과 손짓과 발짓으로 농(弄)을 하든 빨간색 콧수염 미군도 보이질 않는다. 이제까지 철조망 안에서 상냥하든 미군들은 간 대 온 데 없고 당장 달려들어서 총검을 우리 가슴에 꽂을 듯이 눈을 부라리고 위협하는 야전군의 풍모가 풍기는 이들은 우리에게 한껏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필시 전황에 이상이 있고 우리의 신상에 변화가 일고 있다. 우리는 밖을 내다볼 수 없는 배 밑 창고에 갇히고, 문은 서서히 닫혔다.
기관의 굉음이 창고 같은 선실 공간을 가득 채워서 얕게 깔린 포로들을 짓누르고, 쐐기 밖 듯 조여진 우리의 흔들림조차도 억제할 따름이다.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수장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획물을 처분할 수 있는 승리자의 특권이다. 따져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 어쩌면 이대로 말살될지도 모른다.
공포로 쐐기 박혀 움츠린 몸은 서서히 체념의 용해제로 녹아서 요동하기 시작한다. 시도 때도 모르고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공중으로 뜨는지 물속으로 가라앉는지 알 길이 없는, 짐짝이 되어 이리 굴리고 저리 밀린다.
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나 홀로,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북으로 올라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