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외통궤적 2008. 8. 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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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2.011206 제주도

여기가 제주도다. 딴 나라 같이만 생각되던 제주도를 지금 내 발로 밟아 걷고 있다.

섬이라면 조각배같이 떠있는 내 고향 앞 바다의 ‘알섬’과 ‘희역섬’만 생각하게 되는데, 이렇게 큰 섬은 보기도 처음이고 발붙임도 처음이다. 새로운 환경에 어리둥절 하는 시골뜨기 나에게  여러 가지를 보며 느끼게 한다. 난리의 덕인가 삶의 보상인가, 어쨌든 눈알이 자꾸 구른다. 배에서 내려 훈련소로 가는 길에 많은 훈련병의 대오(隊伍)를 스쳤다.

 

만나는 훈련병이 바로 내 모습이다.  그들은 무거운 철모와 얼굴을 덮을 만한 안경과 긴 총을 메고 소리높이 부르는 군가에 몸을 실어서 밀려가고 있다. 얼굴은 사람이기보단 짐승에 가깝다.  스칠 때마다 훈련병이 몰고 온 먼지구름이 회오리 지고, 여기에 우리가 몰고 가는 먼지먹구름과 합쳐지면 교차되는 대오의 접점은 사람을 알아볼 수 없게 암흑으로 변한다.

 

발등에 차오르도록 쌓인 흙먼지 길을 후비고 먼지굴속을 헤쳐 나가야 한다. 우리의 대오가 훈련소를 가까이하면서 가벼운 바닷바람이 먼지를 한라산 쪽으로 밀고 올라간다. 앞이 트이고 정신을 치릴 수 있다. 흙이라면 황갈색 또는 적갈색인줄만 알았는데 제주도의 흙은 잿빛흑색이니 흙이라기보다 검은 재다.

 

 

나는 잿더미 위를 용케 떠밀려서 걸어가고 있다. 돌도 검은 곰보 돌이다. 얽히고설키는 재주를 돌이 갖고 있는지, 사람이 부리는지는 몰라도 들길의 돌담은 한 겹으로 잘도 올라가 싸여있다. 이 또한 진기하다.

 

 

바람이 멎으면서 흙먼지는 다시 우리를 에워싸며 우리와 함께 떠가고 있다. 바람은 아직 드세질 않다.  이런 흙먼지 구덩이에서 나날을 보내는 훈련병의 안질(眼疾)은 그 도가 얼마나 심한지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특이한 안경을 쓰고 있는 훈련병이 유난히 많은 것으로도 금시에 직감(直感)된다. 육지의 여느 곳에선 볼 수 없는 괴이한 풍경이다.  머지않은 곳에 훈련소 정문이 보인다.

 

훈련병, 그늘을 지울 나무 한 그루 없다.  억새풀과 이름 모를 자잘한 풀포기 같은 나무가 온산을 깔고 덮어서, 밀착된 옷을 입은 여인의 윤곽처럼, 지세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산마다 살이 만져질 듯 얇은 옷을 입고 있다. 수많은 난리의 비를 맞아 쓸리고 할퀴면서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잠시 행렬은 쉬어간다.  멀리 한라산의 위용이 잿빛으로 드러나 천막 기둥처럼 제주도를 떠받치고 있다.  아니다.  백두산의 기둥과 쌍기둥을 만들어서 반도의 천막을 떠받치고 있다. 그 속에 얼을 담고 기를 안아 묻었고 온갖 광물질과 생명수를 머금어 내려오는 반도의 천막, 그 한 기둥이다.  아직 이 천막을 만세에 물려줄 튼튼한 집으로 만들지 못해서, 많은 선조가 피를 보고 스러져갔다. 그 길을 가려고 여기 또 한 무리의 영혼이 이렇게 몸부림치는 것이다.

 

 

나는 반도를 싸고 덮은 천막의 아래 기둥을 보고 있다. 천막으로 살아온 내 짧은 역정(歷程)에서 일깨운 천막의 교훈은, 아무리 현대화된 기술이라도 혼자서는 천막을 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진리에 가까운 이 이치를 나만이 간직하기엔 너무나 값어치가 커서, 누군가가 나를 반도의 천막으로까지 눈을 치키게 하는지도 모른다.

 

 

산을 뒤로하고 정문을 들어선다. 사방에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훈련병들의 군가에 제주의 한 귀퉁이가 들썩거린다. 한라산에서 끌어내린 ‘한림리’의 뒷산이 나직하여 넓은 평원을 이루어, 그 위에 펼쳐진 훈련장이 언덕과 죽은 개울을 끼고 끝없이 숨어있어서, 이 곳 한 바퀴를 다 도는 과정을 육 개월로 치니 여기 흩어진 요소(要所)가 앞으로 모든 위험에서 나를 보호할 소중한 훈련장이 될 것이다.

 

소장은 우리를 장중하게 맞았다. 나는 이제 포로병이 아니라 훈련병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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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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