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연대’의 같은 대대 같은 소대 같은 분대로 배속된 ‘이춘성’과 난 무던히 붙어 다녔다. 지금은 훈련이 버거워 고비마다 고달프지만 탈 없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는 자각으로 충만하다.
종일 다른 생각 할 겨를 없이 빽빽이 찬 일과를 따라가기가 바쁘다. 집 생각, 앞날의 걱정 따위는 생각할 틈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요 며칠 사이에 훈련소 생활에 익숙해졌다. ‘기관 요원’들의 일성(一聲)에 감화되었다. 화장실에 가서는 모자도 벗어 쥐고 일을 봐야 한다며, 창피를 당하는 일 없도록 하라는 주의, 요행히 하루를 지낸다. 첫날부터 모자를 빼앗기고 쩔쩔매는 동료 훈련병의 딱한 사정에 내 가슴이 조인다.
상상한다. 독방에 반듯이 쪼그리고 앉아서 단독 재판(?)을 받는데, 잠금장치 없는 문을 열고 들이닥쳐서 모자를 벗겨 달아난다면 판관 앞에 일어설 수도 없으려니와 쫓아가기란 턱없으니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뿐이고,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작은 재판(?)을 받을 때 누군가 뒤에서 모자를 낚아챈다면 양손에 수갑을 채(?)인 듯 앞에 매여 있으니 꿈쩍 못하고 서서 그저 한번 힐끗 바라만 볼 뿐일 것이다.
군인의 표상으로 가장 소중하게 다루는 모자 없이 민머리로 한 발짝인들 옮길 수 있는 것인가! 머리를 잘라 가는 꼴이다. 놀랍다. 그렇지만 현실을 외면할 순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난 이 물에서 놀고 숨 쉬고 헤엄쳐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동조해서 붙잡아 주거나 신고하는 사람이 없다. 관행으로, 아니 어쩌면 요원들의 신병 갈취의 수단으로 조장되는지 모를 일이다. 나 같은 무일푼이 모자나 그 박의 지급품을 잃어버린다면, 아니 빼앗긴다면 영락없이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제넘질 못하니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칠 수 없고 상사에게 돈을 주며 영외에 나가서 사다 달랠 수도 없으니 한시인들 마음을 놓지 못한다.
모자 탈취 행각은 시와 때가 없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 또한 장비에 대한 관리 훈련을 간접적으로 시킨다고, 선의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만약 한 훈련병이 모자를 잃으면 한 시간에 다른 한 훈련병이 모자를 빼앗긴다 해도 스물네 번, 두 사람의 훈련병이 모자가 없다면 마흔여덟 번의 탈취 사건이 일어난다. 훈련병 열 사람이 모자를 잃었다면 하루에 이백사십 번의 탈취 사건이 일어나니 변소는 군모(軍帽)의 자연 순환 장소이기도 하다. 이것도 자본주의의 유통훈련인가!?
이럴 때, 짝 도움은 천군만마와 버금간다. 서로 망보고 지켜주고 챙겨주니까 좋다. 화장실도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다. 하나는 밖에서 망보고 하나는 안에서 일보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우리 ‘한국군’에게선 일상으로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의 훈련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 모르지만 난 씁쓸하기만 하다. 어째서 가장 우애로워야 할 군인이 불신의 싹을 키우고 있는지, 또 믿음으로 다져져야 할 전우애를 칡넝쿨같이 얽어놓는지, 이해되질 않는다.
작은 일이지만 소홀히 해선 안 될 일 같다.
모자를 잃지 않고 며칠을 지낸다는 것은 극도의 신경전이었다. 신병일수록 새 모자니까 내 모자를 가져가시오 하는 것과 다름없는 광고를 면할 수 있는 며칠이 지나면서 모자는 땀과 때가 묻고 바래지면서 독수리의 눈길에서 멀어졌다.
화장실에서 물고기 튀는 소리, 그리고 바지춤 쥐고 멀쑥하게 두런거리는 신병, 훈련병을 눈에 떠올리면서 취침나팔 소리에 눈을 감고 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