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L.S.T에 몸을 실었다. 제주에서 훈련받은 병사가 명태같이 바싹 말라 돌아오기에 명태 배라고 불린다는, 그 명태가 되어서 부산의 어느 부두에 가고 있다. 악명 높은 제주도훈련소의 소정 기간을 무사히 마치면서, 몸은 기진(氣盡)했어도 뽑히지 않도록 뿌리박은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이 되어가는 내 마음이 가볍다.
한여름에 와서 한겨울에 떠나는 나, 한서(寒暑)의 극한(極限)에서 견디도록 익혀진 나, 계절을 타고 사는 생명의 질서를 거슬러서까지, 사회질서를 바르게 하려고 무한 도전하는 인간무리에 끼인 나, 훈련병은 이제 영광의 무등(無等) 병 94****4번 명태가 되어서 몰골사나운 다른 명태와 두름으로 엮인 채 남해로 밀어닥치는 태평양의 물결에 쓸려 출렁이는 이 배에 실려 가고 있다.
나는 눈을 감는다. 전쟁이 끝나도록 도처(到處)를 헤매고 다니는 나를 고향의 부모님은 상상이나 하시랴! 할머니와 부모님이 고향엔들 부지(扶支)했겠는가 싶다. 어릴 때 할머니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난다.
‘난리가 나면 피란 해야 해’, 하시는 소박한 말씀과 행동, 고식(姑息)적 행동이어도 버리시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어딘가에 토굴이라도 마련하지 않나 싶다.
나는 더구나 북으로 가야 할 이유가 명백해진다. 나는 부모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그래서 사죄해야 한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억지로 꿈을 꾸어본다. 휴전은 휴전이니 언제 개전 될지 모를 테고, 그때엔 기어이 올라가리라! 야무진 꿈이다. 육 개월 동안 흘린 땀이 얼마며 흘린 눈물이 얼마이던가?
등판 박이 'P.W' 글자를 도려내기 위해서 무던히도 문지르고 닦았으니 이젠 떳떳할 만도 하련만 전력(前歷)이 적군이었다는 내 자격지심은 언제나 내 의식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 부분의 훈련은 아직도 많이 받아야 할 것 같다.
생각을 멈추고, 팔베개를 풀어 갑판 위로 올랐다. 해무(海霧)가 동서남북을 가릴 수 없게, 천지가 자욱하다. 찬바람이 귓불을 스치더니 어느새 얼굴엔 물기가 흐른다. 이렇듯, 나의 앞길이 안개와 먹구름을 헤쳐야 함을 암시받고 있다. 그렇지만 움직여 나가자! 나가는 만큼 앞은 열릴 것이다! 확신을 갖자!
다시 배 밑창으로 내려와서 눕고 말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같이 흐른다. 각종 무기의 실탄훈련은 나를 완전한 군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고 포화의 총구를 빠져나가는 폭발음은 내가 살아남는데 자신을 갖도록 고무하며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가시게 했다.
박격포의 장약(裝藥)은 나를 매료시켰으니, 각도와 힘의 세기가 어우러져서 원하는 지점에 떨어지는 것은 마치 구슬치기할 때 서서 바닥에 한 알 남은 구슬을 맞추어 따먹는 재미다.
제일 숙영지(宿營地)에서 ‘삼방산‘에다 표적(標的) 바위를 정하고 무반동총(無反動銃)으로 쏠 때는 마주 뚫린 대나무 토막에다 종이를 씹어 으깨어 집어넣고 공기를 압축해서 앞의 마개가 튕겨 나가도록 ‘꼬질대’를 만들어 쏘아 방에 매달린 전구를 맞추던 재미를 능가했다. L.M.G 기관총 사격은 대나무 장난감 기관총 소리를 연상케 해서 신이 났다. 제2 숙영(宿營)지에서 배운 수색 전은 돌출한 적에 대한 무차별 사격이 적을 섬멸하고 나를 살리는, 이율배반의 전쟁구조를 체험하게 했다.
본능의 호전성 탓인지 아니면 나만의 치기(稚氣) 어린 소치(所致)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릴 때 전쟁놀이에 쓰이든 장난감이 어른들의 땅따먹기와 그 무기로 커졌고 그래서 나의 비어있는 공허(空虛), 도륙(屠戮)의 야만성을 채워주는 것은 아닌지! 소름 끼치는 짓에 나는 만족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문해 보는 게다. 그렇지만 이것은 내 생존의 수단으로, 지금은 반드시 밟고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와 진배없어서, 이 모두를 털고 스스럼없이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작열(灼熱)하는 불꽃과 파편이 ‘삼방산‘의 바위 절벽에 버섯 포연을 피우는 그림을 새겨서 우리의 눈을 부드럽게 했고, ‘한라산’ 중턱 파도치는 하얀 갈꽃이 우리의 총소리를 흡입(吸入)하며 총알을 받아 녹여서 가슴을 씻어주었다.
‘한라산’ 중턱의 넓은 가슴이 우리의 불놀이를 감싸니 초원의 포성은 뚫린 하늘과 트인 바다로 여지없이 빨려들었다. 그리하여 바라보는 제주도는 늘 조용하기만 했다. 아니 평화롭기까지 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해서 낮아진 억새 지붕, 바람을 묶어 잠재우는 지붕, 바람의 위세를 꺾지 못해서 광고하듯 엮어진 동아줄 지붕 망, 바람이 새도록 엉성히 낮게 쌓인 돌담 사이에 한 토막나무 빗장이 빈집을 지키는, 제주의 풍물이 눈에 선하다.
해안을 따라 깔린 마을마다 연못처럼 넓은 샘터를 끼고, 쉼 없이 솟는 용천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척에 바다를 끼고 있나! ‘한라산’의 기를 담아 뿜어낸 맑은 물이 바다를 이기지 못해 지상에 솟나! 제주의 샘물은 짐승을 불렀고 사람을 불러 마을을 이루었다. 제주의 샘은 언제나 마을과 함께 있다. 제주의 샘은 곧 마을이다.
물이 없는 제주의 땅은 어느 곳에는 생명수를 주고 어느 곳엔 불벼락을 주고 있다. 생명의 물은 마을, 불벼락은 분화구, 호구(戶口)와 분화구(噴火口)가 땅 꼭대기와 땅바닥에 나뉘어서 천세 만세에 이어갈 것이다. 나도, 이 한 샘물에서 손을 씻었다. 얼굴도 씻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일등병이 되었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