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초, 터질 것처럼 알른거리는 손가락을 보니 동상의 후유증인 상 싶다.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행동에는 불편이 없으니 그냥 뭉개고 있다. 동상쯤이야 생명에 지장이 없을 테니까. 무리에 끼어서 그런대로 설 안 추위를 견디었다.
춘천을 떠난 트럭이 첩첩산중으로 달리고 있다.
좁다란 하늘에는 빨랫줄에 매달린 홑이불처럼, 뭉게구름이 길게 수놓아 양쪽에 높이 솟은 산마루를 미끄러져 흘러간다. 협곡의 왼쪽엔 집채 같은 바위를 뚫고 흐르는 물소리가 달리는 트럭 소리를 삼킬 것처럼, 세차고 맑게 흐른다.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산허리에 붉은 소나무는 쓰러질 듯 기울어서 남쪽 해맞이 가지를 길게 계곡으로 뻗고 있는가 하면 맞은편 산비탈엔 눈이 하얗게 깔려있다. 트럭은 갈라지는 계곡의 왼쪽으로 접어들어서 부서질 것같이 엉성한 다리를 건너고 골짝으로 가다가 다시 다른 골짝으로 들어선다.
하늘은 한결 넓어졌다. 제법 숨통이 트이는 언덕배기에 좁다란 분지가 보인다. 산기슭으로 밀어붙인 듯 붙여 지은 막사(幕舍)가 여 나문 채 늘어 서 있다. 돌담으로 벽을 치고 진흙으로 바르고서 그 위에 억새 풀로 이어놓은 지붕 아래 작은 창문이 가지런하게 나 있다. 군막은 야전군답게 현지조달로 즉석 구축된 듯이 거칠고 엉성하다. 입은 옷과 병기가 고작인 듯, 트럭 한 대 없는 텅 빈 마당에 쓸쓸히 오가는 병사들의 철모가 무겁다. 끌리는 군화 창이 땅바닥에 빠질 것처럼 처져 보인다.
이곳 ‘사창리’ 골짝에 갓 창설한 00부대의 한 소대원으로 배속되었다. 함께 간 동료 ‘포로’출신 신병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배속되었다.
이제 난 ‘인민군’에서 ‘한국군’으로 그 신분이 전환되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저격하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자살(刺殺)해야 하는 기구한, 오늘을 사는 시대적 희생의 본보기로 둔갑(遁甲)했다.
소대원의 구성은 하나같이 나이 많은 경상도 선배들이고 신출내기는 나 하나뿐이다. 여기에서 복무하고 이 부대와 더불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휴전된 전선을 지키는 교체부대 기능하려 준비와 훈련에 나날을 또 보내야 하나 보다.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작달막한 키의 선임하사는 날 ‘기지기’라고 불렀고 난 그 말뜻을 되물을 수 없어서 엉거주춤 우물거리고 있는 사이 작은 종이 몇 장을 건네주며 우리 막사(幕舍)에 있는 소대원의 병기와 기타 군 장비를 모조리 적고 관리하도록 지시했다. 난 그 일의 성질을 알고 비로써 말뜻을 새길 수 있었다. 아마도 기재 계(器材係)인 듯하다. 그러니까 일반 병이 하는 일 외에 혹 하나를 덧붙여서 날 시험이라도 치듯이 부려 먹는다. 대신 ‘기합(氣合)’ 받는 일은 모면할 수가 있었다. 상당수의 신병 우리 또래가 이래저래 이 부대의 식층(識層)으로 떠올랐나 보다.
충청도 ‘예산’ 출신의 ‘곱뿐이’ 선배는 생리에 맞지 않는 소대장 당번을 한다며 늘 미꾸라지처럼 빠지는 재주를 부리면서도 불평은 ‘부식’ 마련이 고작이다. 별도로 타오는 소대장 식사래야 콩나물 건더기 몇 점 더 들어가는 것이니 언제나 이를 다시 건져내어 고추장에 버무려 밥통 뚜껑에 담아내는 것이 고작이다. 이렇게 한 가지를 더 만들어 내는 것이 이 병사의 임무 중 하나가 된다. 지극히 역겨운 이 당번의 생활이 일반 병사의 선망인 것은 그는 소대장의 ‘줄’이라는 것으로 층층이 시어머니를 모시는 군 생활에서 그나마 매를 피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먹혀들질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사선(死線)을 넘은, 목숨을 초개같이 던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를 극복하는 첨예한 정신력을 견지한 말 없는 병사임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손끝 하나 건드리질 못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언행으로 곧 증명되곤 했다. 올바른 일은 몸을 아끼지 않고 먼저하고 찾아서 하되, 삐뚤어진 일을 시키거나 무모한 위세는 총부리를 겨누어 ‘너 죽고 나 죽는’다는, 용납(容納) 불허(不許)의, 불의(不義)를 묵인(黙認)하지 않는, 특유(特有)의 환경을 겪으면서 밴 기질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 실, 우리가 있는 부대는 고질적 학대가 먹혀들 수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남과 북을 털어서 생활하는 우리, 그것도 일반 사회가 아니라 특수층 군대에서 양쪽을 비교할 수 있는 집단으로 점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훈(政訓) 교육목적으로나 선무(宣撫)의 대상으로나 걸맞은 대접(?)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대 배치를 받은 이후의 내무반 생활이 일대 변혁될 수 있었고, 파격을 맛보는 고참(古參) 병사들은 우리를 남달리 본다. 그들은 우리의 덕을 보고 있는 턱이니까 고참(古參)도 신참(新參)에게 깎듯 하다.
신설 사단의 할 일은 무척 많다. 신참(新參)인 나 또한 버거운 짐을 지고 쫓아가기에 딴생각할 겨를이 없다.
난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고 있는 벌 모, 심을 때 제자리에 심은 것과 달리 자리를 찾기는 영영 글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사코 미련을 두어 마음 한구석에 북쪽 하늘을 바라보는 자리를 잡게 하여 조금만 틈이 나면 그리로 분출하니 스스로는 이것을 억제하지 못한다. 이것을 고참 ‘이태수’가 역이용하고, 난 ‘서산’ 출신 ‘이태수’를 통하여 내가 못 하는 효성을 대리로 만족하며 지극히 효성스럽게 표현해 나간다. 그러니까 쉴 새 없이 해대는 ‘이태수’의 그리움의 고향은 내 고향으로 묘사되고 그의 부모는 내 부모를 대신해서 내 편지를 수없이 받고 있다. 뼈아픈 내 한은 절절히 종이 위에 그려졌고 이를 듣는 ‘태수’ 선배는 미칠 듯이 환호했다.
이래서 ‘이태수’는 내 짝이 되었다.
얼었든 땅이 물기를 뿜더니 어느새 양지바른 축대 밑에 새싹이 돋고, 내가 어물거리는 사이에 앞산의 색깔이 연한 녹색으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