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은 기정사실로 되었다. 장병은 부모와 처자와 형제를 만나러 차례로 고향을 다녀오는 환희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살판난 복무 생활이다. 장병들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높다. 생기가 돋아 있다. 그러나 죽음의 각오로 휴전을 반대한 우리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며 어깨가 늘어지고 있다. 한 부대 안에서 이렇게 양극화하는 분위기는 예전엔 없었으리라. 그것은 이질적인 요소를 갖는 ‘반공포로’가 아직 녹아 스미지 못하고 겉돌고 있기 때문이다.
익히 알고 있는 지휘부에서는 어느 날 우리 갈 곳 없는 ‘포로’ 출신 사병을 모두 트럭에 싣고 서울 나들이를 가는 것으로 휴가를 가름하는, 아픈 거동(擧動?:出動)을 하게 했다. 고향이 남쪽인 장병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의 상처를 건들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런 만큼 우리도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행여 우리의 잘못이 나쁘게 비추어서 인솔자들의 신상에 치명적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배려였다. 그만치 우리의 대우가 우리의 사기와 군의 체면에 새로운 가시로 돋아 있었다. ‘우리는 사선을 넘은 삼팔(3ㆍ8)따라지’라는 특수신분을 주장하고 싶은 욕망과 함께 ‘우리는 부모를 버린 불효’라는 자괴감도 겹쳐져서 형용하기 어려운 복합심리를 표출하고 있었다. 더구나 우리같이 한 부대에 무더기로 뭉쳐있는 포로 출신 사병들의 의중을 도외시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불씨를 안고 있다. 전쟁 중의 상황일 때는 조율하기도 쉽고 지휘하기도 쉬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정전의 상태에서 이룩되는 처음 맞는 환경의 변화에 모두가 어리둥절하다.
부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몽땅 갖추어 싣고 나들이 나온 우리의 몰골이 어떻게 비칠까? 군 트럭으로 ‘종로 바닥’을 누비며 때로는 도로 한복판에 서서, 때로는 시장 한 모퉁이에 서서 설명하는 선임 안내자의 설명에 새까만 병사들의 눈망울이 몹시 바삐 굴렀다. 서울의 삼각산과 남산이 함께 빙그르르 돌고 있다. 북악산과 고궁을 하루에 보고 효창공원에 친 군대 천막에서 야영하듯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은 뚝섬유원지로 향한다.
한여름의 뚝섬이 시원하다. 바람이 강 건너의 버드나무 숲을 흔들면서 구름을 몰아가고, 이어서 부는 강바람이 다시 물 위에 반짝이는 햇빛을 담아서 버드나무 위에 올려놓는, 자연의 놀이마당이 펼쳐지고 있다. 강가는 한결 시원하고 한가롭다. 강가 진흙밭으로 꾸역꾸역 모여드는 색색 인파는 우리의 설 자리를 점점 좁혀온다. 우리의 차림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차라리 밀리고 사라졌으면 싶다. 그래도 인솔자는 자기 책무를 다하려고 지루한 시간을 끈기 있게 참아준다.
우리의 존재가 점점 작아지면서 트럭도 보이질 않고 군복의 색깔도 눈에 들지 않는, 오감의 마취 상태로 점점 깊어 간다. 어설프던 몸동작도 부드러워지고 고갯짓조차 자유로워지면서, 비로써 유흥의 맛이 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죽고 사는 이분으로만 생각하든 내겐 남달리 감회 깊다. 바람의 부드러움을 만질 수 있었다. 보이는 것 모두가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만을 생각하든 난 율동과 약동(躍動)이 아우러져서 생명의 창조를 암시하는, 물의 흐름 속에서 파도치는 인간들의 숨결을 보았다. 죽은 사람은 죽었으되 살아 있는 사람은 자연을 구가하며 생명의 환희를 만끽할 권리를 외치듯, 넘치는 강물과 사람 물결과 부닥쳤다.
나도 인간으로 새로 태어났다! 만세!
날 포로로 잡아갈 사람은 없다, 만세!
모든 서울시민이 우리를 반겼다. 서울의 모든 산야가 우리를 안아 들였다. 고궁에선 선열들의 넋이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했다.
보이지 않는 장벽을 넘어서 억지 서울 나들이를 하는 우리들의 짧은 일정이 돌아오는 길엔 오히려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