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점점 잡혀가면서 부대와 소속원은 한 가족처럼 병영생활을 즐기고 있다. 부대원 모두가 기뻐하는 내 나들이의 한 계기가 또 마련되었다. 남들이 몇 번씩 다녀오는 휴가를 삼 년 동안 버티면서, 내가 부대장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역지사지의 처지가 어쩔 수 없이 되었다. 싫지만 권하는데 못 이겨 또 한 번의 남의 휴가 구경(?)을 하게 되어있기에 불만은 있어도 나름의 속셈을 해 본다.
되도록, 내가 앞으로 놀아야 할 물의 깊이와 너비와 흐름의 세기를 몸에 익혀야 할 것 같고, 그 기회가 자주 있어 도움이 될 것이란 절실한 생각이 이즈음 따라 더해진다.
주섬주섬 챙기고 남의 행차에 열없이 어깨를 비볐다. 갇혀 6년의 세월을 마감하고 새 터전을 열고 싶은 것이다. 게다가 ‘신성범’은 결혼한 사람이니 내 행동반경은 반으로 축소될 판이지만 이 또한 배움의 차원에서 체면을 무릅쓴다. ‘신성범’, 그야 골백번 좋은 일인 것을, 나로 하여 그의 휴가 기간을 무한정 연장할 수 있으니 오죽이나 좋으랴! 단위 부대에선 며느리 친정 보내는 시어머니처럼 온갖 것을 다 챙겨가며, 부대가 온통 나로 인하여 들떠서 날리다.
난 이렇게 출발했다.
이번 나들이는 강원도 ‘사창리’ 골짝보다 더 좁은 심산유곡으로 들어가고 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든 오지(奧地)의 땅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양지리 마을’까지 다다랐다.
산과 산이 맞붙어서 이어졌고 하늘은 그려 넣은 듯이 좁고 길게 뻗어 있어서 별천지다. 다락처럼 매달린 논과 밭엔 무엇이 심겨 있는지 알 수 없고, 물고 소리만 요란히 골짝을 울리고 있다. 목을 젖히고 눈을 흘겨 올려 보아야 겨우 하늘 끝에 매여 있는 나뭇잎을 볼 수 있다. 폭포 소리는 요란히 들리나 깊은 계곡 밑 개울물은 보이지 않는다. 협곡의 바위를 깎아서 낸 길 위엔 소의 배설물이 줄을 지어서 우리를 갈지자로 걷게 하고, 넘어온 ‘감악산’의 뒷머리 위에서 하늘 높이 가로질러 건너편 산속으로 숨어버리는 까투리 소리가 골짝을 울린다.
여기는 태고의 정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감나무가 많은 이 마을은 바위와 나무가 잘 어우러진 산기슭에 매달려있다. 건너편 ‘과부마을’을 소개한다.
그 유명한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소개하는 ‘신성범’의 얼굴은 남의 일을 말하는 사람처럼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실, 이 사건에 관한 한 아무도 자기 의견을 담거나 흥분할 수 없는 아픈 과거와 말 못 할 응어리가 얽히고 있어서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야기의 골자는 기막힌 우리네 현실이기에, 무지렁이 내가 듣기에도 숙연해지는 것이다.
공비에게 밥을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혈연적 관계, 이 혈연적 관계를 이용해서 그들의 정보를 수집하는 공비의 소행, 이를 괘씸히 여긴 경찰과 군의 범인 색출과정의 무리, 그 과정에서 악역을 맡게 되는 마을 유지의 고뇌 어린 선택과 실수,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원혼의 달램과 분노의 억제, 산 자는 마을 유지를 은인으로 추앙하고 죽은 자의 어버이와 처자식은 마을 유지를 천추의 한을 남긴 원수로 보고 절치부심(切齒腐心)하는, 싸늘한 마을의 정서를 얘기하고 있다.
한 마을의 많은 희생자가 공비의 누명을 쓰고 지하에 묻혔는데 이 사건이 국회까지 들썩여 국회의 조사단이 조사하러 들어올 때, 공비를 가장한 현지 주둔부대의 병력이 조사단을 습격하여서 조사를 방해하는 이중의 사건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시시비비를 가를 겨를이 없다. 오직 힘을 앞세운 제압만이 평화의 보장이란 단순한 이치를 알고 있는 군은 수습의 차원에서, 충정이었지만 사후에 판단하는 사회적 물의는 비등했다.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억울한 영혼의 눈물인지 하늘의 슬픈 노여움의 서슬인지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한식날, 하나둘씩 공동묘지에 유족들이 찾아왔다. 떼를 입히고 난 다음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옷자락을 매만지며 울고 있든 한 지어미가 중얼거리며 내려갔다. ‘너 죽고 나 죽자’ 누가 선창한 것도 아니고 누가 주도한 것도 아니다. ‘그놈을 박살 내자’ 손에든 삽자루와 곡괭이를 어깨에 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조장으로 하얗게 몰려가서 막 잠에서 깨어난 주인을 마당에 끌어내어 난타하여 박살(撲殺)하고 말았다. 그리고 태연히 앞앞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고 누구도 편 들수 없는 대명천지의 살인이었다.
여기까지 얘기한 ‘신성범’은 날 흘낏 보며 말하였다. ‘다 지난 이야기다.’ 내가 모르든 ‘신원 사건’의 전모를 알려줌은 무슨 의도일까? 그는 좌우익의 갈등을 눈으로 체험했고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으니 내 ‘포로생활’이 정녕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리라! 그들은 전장에도 나가질 않았고 총도 들어보질 않았으되 죽음에 이르렀으니 넌 모든 면에서 선택된 사람임을 일깨우려 했는지 모른다.
‘신원면(神院面)’. 과연 귀신이 모셔지는 집을 미리 알고서 지은 이름인 것 같아서, 적중한 선견의 지혜가 섬뜩하다. ‘신성범’의 동네는 ‘양지(陽地)마을’이니 이런 불상사는 피했을 것이고, 음지마을인 ‘와룡(臥龍)리’의 용이 심술을 부려서 애꿎은 영혼만 데려갔다, 싶으니 더욱 선현들의 동네 이름 지음에 관심이 가는 오늘이다.
난 곰곰이 생각한다. 산다는 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신의 가호’가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다시 절대자의 섭리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삶의 참뜻을 새기는 휴가 소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