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외통궤적 2008. 8. 11.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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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모자 차양이 있으니, 하늘이 무서워 가리고, 차광(遮光) 부채를 양 귀에다 걸고 곁눈질을 막았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리고 뛰니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지나갔는지 난 모르는, 긴 세월을 보내면서 야생의 인간으로 되어버린 나에게 진실한 인간 생활의 면모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오늘이다.

부시 깃 불붙여서 아버지의 긴 담뱃대 끝에 올려 드리고 싶다. 어머니의 굽은 허리를 자근자근 두드려 드리며 앙상한 어깨뼈에 내 팔을 걸쳐보고 싶다. 할머니의 늘어진 손 가죽에 내 두 손 포개어서 갈라진 마디에 내 따스한 입김을 불어 녹여드리고 싶다. 누나의 수줍은 신방을 엿보고 놀리고 싶다. 동생과 함께 진종일 걸으며 형의 사랑을 주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못 견디겠다.

마음의 차양과 차광을 제치고서 트인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 고요한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게 우리 집과 우리 식구와 내 고향과 연관 지어 생각되니 이게 웬일인지 모르겠다. 한꺼번에 밀려드는 향수, 그것은 날 몹시 비참하게까지, 진창으로 쑤셔 넣고 있다. 이럴 땐 내 특유의 냉정함도, 현실인정의 비굴함도 깡그리 그 둑이 무너지고 도도히 향수의 물결에 내가 떠내려가는, 무력함을 절감한다.

내가 왜 이러나! 잠시 고개를 흔들어서 정신을 가다듬는다.

향기로운 흙냄새가 내 집으로 날 들이고, 뿜어내는 나무 냄새는 뒤란에서 날 부르는데, 징용 뽑힌 아버지 숨으시라고 뻐꾸기 우짖는다.

이 한때를 하루 같이 기억하여 오늘에 이르렀건만 오늘따라 유달리 심란하다.

허공에 떠서 잔 간밤의 잠자리가 너무나 푹신하여 나 같질 않았다. 얼굴이 하얀 동료는 서울 사람 같아서 어울렸건만 얼굴이 새까만 난 산골 꼴머슴 같아서 서울의 잠자리가 들떠있었다. 이것이 나의 현주소다. 요게 바로 나의 진면모다. 그래서 내가 서먹했나 보다. 그러나 나도 머리를 하늘에 둔 사람이니 어딘가에 내게 어울리는 곳이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평안을 되찾고 있다.

아직 난 얼굴에 무엇을 찍어 발라본 적이 없다. 그럴 마음도 형편도 아니니 내 몸 어느 부위건, 물로 씻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 위에 덧바른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짓으로 여기고 비누도 쓰지 않는 괴짜였다. 그것이 뿜어내는 향내가 자연스럽지 못한 이유에서였다. 비누도 역한 냄새로 밭아 들였다. 이것은 내 시골풍의 체질 탓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고 일어나서, 세수한 내게 어울리지도 않는 이런 것을 내미는 동료의 권유로 바르긴 했어도 도무지 끈적이고 미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다. 한겨울이라도 있는 그대로를 고집하는 내 성격에 전혀 걸맞지 않다.

난 생각한다. 이것이 사람의 사는 온갖 방법의 한 단면이구나! 거리낌 없이 바르고 문지르는 그의 행동에 난 거부감마저 느꼈다. 그것은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동처럼 여겼기 때문이리라. 바르는 것은 여자들만의 전유물이지 남자는 거울도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고루한 생각이 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부자연스럽고 불유쾌하기까지 했다.

하룻밤을 동료의 누나네 신세를 지면서, 세상 사치(奢侈)의 극을 본 듯한 이 얼굴 치장이 날 여기 ‘대한민국’의 ‘민간 생활’의 맛을 보게 한 효시(嚆矢)이니, 손가락으로 소금을 찍어서 혀끝에 대보는 심경으로, 짧은 외출을 마쳤다.

‘충무로’의 아침은 곳곳의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하수구 김으로 아침 해를 받아 열었다. 충무로의 얼었던 밤이 피어오르는 김과 햇빛이 아우러져 녹고 있다.

내 마음도 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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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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