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나 같은지는 모르지만, 모르는 것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괴벽과 이 괴벽을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덮고 일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노력은 내가 보기도 눈물겹다. 그래서 사람을 사귀면서도 돌다리 두들기고 건너듯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고 만져보고 굴려봐서 나와 같은 꼴로 되어서 같이 구르며 같이 찌그러지고 함께 굳어질 때 내 마음도 열리고 그에게 나를 내보인다. 그러기 전엔 늘 움츠리고, 시늉만 해서 하는척하되 내게 흠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다가 나만 흠이 나고 상처가 날 성싶으면 얼른 껍질을 씌우고 그 안에 단단히 각질을 만들어서 상처 입지 않도록 준비한 다음 그 상태로 어울리는 습성이 있다. 이것은 타고난 내 성정이요 잠재된 내 열등의식의 한 단면인데, 아무리 고치려 해도 고쳐지지 않고 속을 끓게 한다. 더욱이 자기를 위장하고 허장성세(虛張聲勢)함으로써 나의 기를 제압하고 나를 굴종시키려는, 타고난 자기의 성정(性情)을 숨겨가며 어울리려고 하는 상대일 때, 난 더욱 껍질의 막이 두꺼워짐을 느낀다.
만 가지를 다 알고 해결할 수 있고 자문할 수 있는 식견을 구비 했을 때 비로써 사람들과 대화하려는 완벽주의는 언제나 날 고독하게 했고 남들이 날 제쳐놓는 한 이유가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시간이 흐르고 갖가지 부닥침이 조금씩 날 그들과 가까이 다가가게 했고 오랜 시간 날 알고서는 그들도 이물 없이 겹쳐서 다가왔다. 그래서 몇 겹의 우정이 쌓이게 되는지도 모른다.
야전 생활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전시에서의 인간관계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적과 아군의 양분(兩分)에서 비롯되고 그 이상의 아무것도 염두에 둘 여지가 없으니 차라리 적만 식별하는 단순한 감지(感知)만 있으면 되련만 전쟁 없이 늘어진 병영생활을 하는 이즈음엔 복잡한 인간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갖가지 사회상이 그대로 여기에 반영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나는 이즈음 몹시 당황스럽다.
그동안 나와 업무상 연관으로 맺어진 열 손가락 안에 들 전우들은 모두가 괴팍스러운 나의 성품을 잘 이해하고 서서히 가까워짐으로써 형제애 넘치는 우정을 주었다.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군에 온 ‘서산’ 친구 ‘이태수’는 내가 본부로 오기 전까지 모든 일의 상담을 나와 했다. 그래서 함께 자기 고향에 휴가도 가게 되는, 참다운 전우로 되어버렸다. 갈 곳이 없어서 휴가 가지 못하는 내 심기가, 내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날 편안하게 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의 문이 열렸을 것이다. 줄레줄레 따라가는 내 몰골을 상상하면 한발도 옮길 수 없는 자격지심이 들련만 난 초월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날 이해할 수 없도록 변해가고 있으니 내 마음의 문이 얼마나 좁고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 짐작된다. 그래서 난 새로운 나를 알게 된다.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양지리’에서 면 산업계에서 근무하다 왔다는 ‘신 성범’ 형은 나보다 군대 후배지만 나이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아저씨뻘인 스물여섯 살, 맏형 같은 마음 씀씀이로 넉넉하고 푸근했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 나의 속마음을 살펴서 내 자존심을 건들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로선 죽기보다 더 싫은 남의 고향 방문이니 오죽하랴만, 이 모든 걸 녹이는 용광로 구실을 해내고 있는 ‘신성범’이다. 훗날 잊을 수 없을 전우들이다.
충청도 출신 ‘조’ 하사는 너무나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는 친구였다. 어느 날,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하고 싸우면 자기가 이길 것이란 도전장을 내는 것이다. 난 당연히 접수(?)했다. 저녁 무렵 아무도 없는 넓은 마당에 나갔다. 내 의지를 알 까닭이 없는 그는 내가 그대로 농담으로 얼버무려 물러설 줄 만 알았는데, 그대로 나와 붙었다. 그리고 뛰었다. 내 눈에 번개가 튀었다. 그리고 내 차례라고 느낀 난 달려들어서 낚아챘다. 그는 내 손아귀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멱살을 빼지 못하고 양손을 파리 앞다리 비비듯이 잽싸게 비비며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니까 서슴없이 꿇는다. 과연 변신의 귀재다. 조금 전까지의 패기는 어디다 감추어 두고 말았는지 보기에 안쓰럽다. 맞아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지, 그까짓 매가 무서워서 파리 앞다리 꼬듯이 비비는 그에게 더 손을 댄다는 것은 내 마음이 허락하질 않았다. 이튿날 내 눈은 시퍼렇게 부었으나 그는 아무 흔적이 없다. 동료들의 웃음에 나는 ‘조 하사 싸움 잘해! 내가 졌어!’ 옆에서 듣는 조 하사의 가슴이 후련했을지 아니면 쥐구멍을 찾았을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나를 몰랐고 다른 이는 나를 아는 그 차이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죽음을 초월한 나의 입지를 헤아리질 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전부가 부끄럽게 된 것이다. 내가 그런대로 마음 편한 것은, 그때 그에게 작은 일격이라도 가했더라면 제대를 앞둔 난 이렇게 설렐 수 없으리라! 지금쯤 감옥에서 다시 영어의 몸이 되어있을 테니까.
그는 날 몰랐다.
‘전라북도 김제군 출신의 ‘김정곤’ 선배는 운동을 좋아했다. 나와 함께 배구코트에서 자주 뛰고 즐기고 웃겼다. 날 보고 팔다리가 길다고 ‘버마재비’라며 놀리곤 했다. ‘버마재비’가 무슨 짐승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면 ‘김정곤’은 팔을 벌려서 내리고 엎드리며 다리를 벌리며 그 시늉을 하곤 했는데 아마도 다리가 긴 곤충을 말하는 것 같다. 이상 체형을 감지 한 것이다.
어느 한때 ‘김종덕’ 소대장은 ‘날 팔등신’ 미인이라고 했으니까! 싫지 않았다. 별명이 있다고 함은 그만큼 관심이 있음을 나타내어 주는 다른 하나의 표현 수단이기 때문에 기분은 오히려 좋다.
이제 이들과 작별하려는 내 마음을 다지면서, 모든 지난 일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의 까마득한 흐름에 발밑이 닿질 않아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날 보면서, 날 빨아 당기며 별처럼 다가오는 미래, 그 허공에 맡기고 싶다.
‘등화관제(燈火管制)’ 하의 병영은 칠흑같이 어둡다. 하늘과 산등성을 가른 별빛이 흐르는 임진강의 깊은 골을 겨우 알아보게 할 뿐이다. 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의 물소리는 들리질 않는다. 북의 물을 갈라놓질 않는다. 귀를 기울여서 눈을 밝혀서 북의 소리를 듣고 북의 산야를 보고 싶다.
그 속에 고향의 냄새가 배어 있을 것 같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