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그럴듯한 고래잡이의 기지 포항에 기차가 닿은 때는 해가 바닷바람에 밀려 열기를 잃고서 서산의 낮은 구릉(丘陵)에 주저앉을 무렵이었다. 비린내가 바닷가를 알리고, 흰 파도를 환호하여 우짖는 갈매기가 깎아낸 바위산을 오르내리며 석양에 반짝인다. 갈매기가 잡힐 듯, 산 밑에 자리한 군 시설에 들어섰다. 아마도 징집을 총괄하는 집인가 보. 여기서 간단한 신체검사와 군복을 지급 받고, 또 어깨가 내려앉는 텅 빈 가슴을 안아내는 고비를 넘기고 있다.
우리에겐 이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굳이 절차를 꼬박꼬박 밟아나간다. 앞앞의 신분을 헤아릴 수 없어서 그렇겠지만 야속하기까지 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사소한 이 일이 또 나를 우울하게 한다. 벗은 옷을 싸서 집으로 부치라는 것이다.
대체 어디로 부치라는 것인가? 펼쳐진 전선을 뚫고 고향으로 가랄 수도 없고, 지옥 같은 철망 안의 포로수용소로 가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곡’면에 있는 ‘의령경찰서 정곡지서’로 가랄 수도 없고, 규칙상 그냥 버려 둘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니 망연자실하는 것이다.
눈물이 핑 돈다. 앞으로 돌출적인 이런 일이 내 행로에 적지 않게 걸쩍거릴 것이고 그 때마다 내 심금을 울릴 것이다. 그래서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지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한다. 가든 말든 고향집주소를 써버릴까? 그렇게 한다면 내 행동의 심층(深層)이 의심받을 것이고 쓸데없는 오해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는 과정에 공연히 시끄러운 말썽의 소지도 있을성싶다. 해서 나는 하늘의 주소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석곡리 곽 문덕 구장’ 앞으로 써넣고 포장마무리를 하고 말았다. 받는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싶어 망설이다가도 이 또한 국수틀에 넣어진 반죽처럼 뚫린 구멍으로 빠지는 수밖에 없다.
아무쓸모 없는 넝마 같은 옷과 신을 받는 구장내외분의 어이없는 얼굴, 버릴 수도 입을 수도 없는 이 옷을 받은 구장의 벌레 씹은 얼굴을 상상하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나도 쓴 입을 다시고 있다.
이튿날. 그동안 나와 얽혀진 묘한 인연으로 다가온 짝을 만났다. 기쁘다. 전전하든 수용소에서 단짝이 돼서 돕고 대화하던 짝 ‘이 성춘’과의 만남은 내게 많은 힘을 실어준다. 그도 같았으리라! 이후 적극적으로 붙어 다니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피차가 노력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 둘이 다시 짝이 되고자하는 무언의 약속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