벱새

외통궤적 2008. 8. 1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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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2.011218 뱁새

길섶의 마른풀이 눈 녹은 물을 머금어서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지난해 장마철에 민둥산을 흘러내렸을 석비레가 작은 물길을 덮쳐 뭉개며 길 위에 얇게 깔려서, 사각사각 소리 내어 새 발자국을 새겨준다.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이 작은골을 봄볕이 화사하게 비친다. 땅 지붕을 헤치는 새싹의 기지개 소리가 들릴 듯하다. 뱁새 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워, 모래알 밀어내는 새싹을 쪼아 먹을까 조마조마하다. 땅속은 아직 고요 하고 하늘은 새들의 놀이터다.

남들은 그렇게도 잘 나가는 외출을 애써 외면함은 돈 부쳐줄 사람 없으니, 돈이 없어서도 그렇거니와 내 외곬의 비뚤어진 성정 탓인 걸 잘 알기에, 일부러 한가한 외출을 삼간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건 빠짐없이 내 태어난 고향 집과 나와 연계되어 생각되니 있는 그대로를 숙명으로 받아서 이해하고 받아들임이다. 그래서 이 기준, 여기다 나를 맞추어서 행동하고 비기는 것이니, 이런 짓을 오늘까지 한시도 잊지 않고 지켜오며 살고 있다. 훗날은 어찌 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모든 행동을 수도(修道)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있다. 그러는 내가 단출하게 영외(營外)의 호젓한 곳으로 벗어난 것은 근래에 없던 일이라, 새롭고 싱그럽다. 가볍고 상쾌하여 봄날의 관측 나들이(?)가 소풍 길 같다.

후배의 발자국이 눈길을 밟듯 내 발자국을 되밟으며 장난기 보태어 그 무거운 입술을 연다.

‘우리 시합 한번 할까요?’

‘무슨 시합?’

‘뱁새잡이 합시다!’

‘무엇으로?’

‘총으로요’

‘그래?’ 되묻는 내 물음에 모든 걸 알아차린 그는 더 내 기분을 상하지 않으려는 듯, 입을 열지 않았다. 잎 떨어진 가시넝쿨이 군데군데 뭉쳐있어 갈 길을 막지만, 빤히 보이는 언덕을 순식간에 올라챘고 임무는 완수되었다.

해를 받고 내려오는 서향 길이 올 때보다는 더 짧고 한가하다. 내 발길이 내 발자국이 찍힌 데를 되 찍게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 그렇다. 지금 난 선명한 내 발자국을 바라보고 있다. 내 지난 고난의 발자국이 여기에 찍힌 발자국과 겹쳐서 아름답게 아롱거린다.

내 할 일을 마치고 여벌의 임무를 수행하는 내게 던진 유혹(?)의 제안은 잠재된 내 깊은 골을 들쑤셨다. 임무를 수행하며 헛된 짓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내가 오기를 부린다. 지금 총소리가 나면 부대는 발칵 뒤집힐 것이다. 오발? 자살? 탈영? 적의 출몰? 이 모든 가상의 의문과 결과에 책임을 지고 그 벌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이때까지 내 맘대로 총을 쏘아본 적 없다. 그것은 남북 ‘양쪽 군대’ 어디서나, 그랬다.

지정된 자리에서 지정된 표적을 지정된 감시병의 감시하에서 지정된 탄약 수량만큼만, 사격명령에 따라서, 언제든지 피동적으로 쏘았다. 야전 훈련 때도 그 훈련 목적이 죄다 이런 틀을 벗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을 바꾸었다. 그것은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한낱 철부지 어린애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참새잡이의 지난 생각이 불현듯 지나간다. 눈 오는 날에 소쿠리를 작은 막대에 끈을 달아 고아놓고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뜨락 문 창호지를 문질러 구멍을 뚫고 그 문구멍으로 바구니에 달린 끈을 집어넣어 방안에 들이고서 눈이 뚫어지도록 내다본다. 영악한 요놈의 참새들은 바구니로 오도록 줄지어 부려놓은 벼알만 쪼아 먹고 푸르르 나라가 버리면 애태우던 난 밖에 나가 휘젓고 말았든 짓.

멀쩡하게 살아있는 쇠꼬리 한 올을 뽑아다가 올무를 만들어서 눈 속에 깔아놓고 벼를 뿌려놓으면, 요놈 눈 밝은 참새는 내린 눈과 손댄 눈을 용케도 구별하고 흐트러진 벼만 쪼아 먹고 그대로 푸르르 나무 위에 오르면, 이번에는 싸리나무로 눈과 함께 확 쓸어버린다.

구부러진 뽕나무 가지를 잘라 토막 내서 휘어 양 끝에다 활처럼 끈을 매고, 가는 싸리나무로 참새 키만 하게 둥글게 휘어서 끈 사이에 끼고 돌려서 탄력을 쌓아 틀에 걸치도록 한 다음, 제쳐서 바치고 코를 만들어서 거기에 걸고, 그 끝에다가 짚 낟가리에서 찾아낸 벼 이삭을 걸면 새 틀이 만들어지는데, 다음 눈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던 눈은 오는데, 천지가 희도록 와야 하련만 검은 구석이 많고 새들 먹을 음식이 있으면 도무지 찾아오질 않는다. 또다시 눈 오기를 손꼽아서 기다리다가 큰 눈이 왔다. 새들은 떼 지어 지붕 밑으로 모여든다. 때는 이때다 싶어서 얼른 새 틀을 갖다가 눈 속에 설치하고는 보드라운 비로 고르고 또 문구멍을 뚫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집 멍멍이가 새를 잡는답시고 뛰어들어서 휘저으니 판은 ‘개판’이 되고 말았다.

이런 추억의 파도가 일면서, 지긋지긋하게 달려들든 새때를 몰아내느라 동무들과 공놀이 물놀이 모두 못 하고 논배미 새 쫓기에 나섰던, 원수 같은 새를 내 손으로 잡아보려고, 기회만 있으면 고무총도 쏘고, 들판에서는 무리 지어 나는 새 떼에 돌팔매질도 해서 잡곤 했던, 생각이 겹치면서 어릴 적 장난기가 동했다. 굳이 따져보자면 한 마리씩 겨냥해 잡진 못했어도 무리를 겨냥했을 때는 재수 없는 새가 떨어지는 기쁨도 있었다.

이런 생각에 뒷일은 까맣게 잊고, 올 때 지껄인 말을 되새기고 그 후배에게 눈짓했다. 각자가 재주껏 잡는 것이다.

뱁새의 몸놀림은 집 새보다 더 날렵한 것 같다. 어찌 됐거나 카빈총으로 겨누었다. 넝쿨 구석, 구석에서 한순간도 쉼 없이 꼬리를 움직이며 날아 옮기는 뱁새의 표적이 들어왔다.

뱁새는 거죽만 남고 말았다. 내친김에 여러 마리를 쏘았다. 동료도 몇 마리를 잡았다. 당연히 내가 이기긴 했어도 뒷일이 켕긴다.

난 이렇게 해서 또 다른 한 꾸러미의 새잡이 용구를 체험한 꼴이 됐다. 종일 날아드는 참새 떼와 싸우며 애먹든, 논배미 새 보기의 진저리를 비로써 확 풀 수 있었다.

젖은 땅이 총소리를 먹었는지, 얼기설기 얽힌 덩굴 숲이 폭발음을 빨았는지, 같은 시각 어느 부대에서 포라도 쏘았는지, 후한은 없다.

작은 꿈은 언제나 현실로 다가오는 것, 기다리고 참고 견디면 이루어지는 것인가?

돌아오는 길, 저쪽 한탄강의 물결이 햇빛을 받아 비늘처럼 반짝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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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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