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

외통궤적 2008. 8. 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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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0.020101 결심

어려움이 닥치면 혼자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나다. 늘 마음 한구석에 내가 이 땅을 택한 결정적 이유는 되새기는 버릇이 생겨있다. 이 버릇은 누구와 의논할 수 없는, 유별난 내 처지를 알고 있어서 또한 외롭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몰고 가는 흐름을 트고, 몰고 가는 습성조차 길러있다. 이젠 군에 몸담고 있다고는 해도 군인의 신분으로 고향에 입성하기는 영 틀릴 것 같고, 그렇다면 일생을 군인의 신분으로 지낼 것인지 아니면 바닥에서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지를 가름하는 때가 된 것 같다.

이 무렵의 계급조정신청은 장기 복무의 바탕으로 되는 것이기에 나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그 진급 시기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진급 신청을 누락시키곤 했는데, 안 올라가려는 계급도 올라가려는 사병들 계급 못지않게 요령과 힘이 드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행정에 참여했기에 이와 관련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나는 밀려서 계급이 올라가기 싫었고 밀려서 하는 긴 군 생활이 싫었다. 군은 나에게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 이 땅에서 살, 떳떳한 일원으로 되고 싶어서 택한, 한 방편이었다. 다른 한편은 고향으로 가는 일 번 주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제, 그런 상황이 물거품이 되어서 말끔히 사라진 마당에 내 거취를 주저할 바는 없다.

집이 없으니 오라고 할 사람도 없고 아는 이도 없으니 서둘지도 않건만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많은 병사가 장기 복무를 지원하면서, 거꾸로 가는 나를 보고 모두 의아해했다. 그렇다. 내가 보기도 그렇다. 당장 나가면 밥걱정부터 해야 한다. 군대에 있으면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게다가 잘만하면 출세까지 하니 뉘 아니, 마다할 것인가?

마땅히 품는 의문에 대해서 나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이 땅을 선택할 때 심은 특별한 이유, 잠재우고 있던 그 이유를 들추어 찾을 수밖에 없다. 뉘라서 막을 것인가? 깊이깊이 박혀있는 내 다져진 마음의 바닥을 뉘라서 헤집을 것인가? 제대는 휴전 이래 처음 시작하는 행사다. 군의 피 순환이니 마땅히 걸러져야 한다는 이론일 것이다. 하나, 폐허로 남은 이 땅의 온갖 시설은 젊은이 하나를 받을만한 자리가 없다. 그래서 농사일을 할 사람 말고는 군에서 물러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기막힌 사연이다. 군이 돼지우리도 아니요, 무위도식하는 거지 패도 아닌데, 세월을 까먹고 젊음을 썩힐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나 같은 입장의 사람은 꼭 군대에 남아있어야 하련만, 오히려 뛰쳐나가려고 하니 이 어찌 거꾸로 가는 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난 결심한다. 도도히 흐르는 생존의 물결에 휩쓸려서 죽든 살든 판가름을 내고 싶다. 그러면서도 군대 안에 안주하고 싶은 미련도 있다. 그것은 단순히 밥을 거저 먹여주기 때문인데, 밥을 먹기 위해서 군대에 머문다면 나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애써 이 길을 외면하는 것이다.

오라는데? 갈 곳? 아는 사람? 깡그리 내게는 닿지 않는 말이다. 나 같은 사람, 나 같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제대 신청 서식은 하나도 없다. 백지로 낸다면 영락없이 문제가 될 테고, 해서, 아는 곳이라곤 군대 친구네 집뿐이니 안 되고, 칸 메우기에 적절한 모든 수단을 강구 하여 그럴듯하게 꾸며 제대 신청을 한다.

그렇게 쓰지 않는다면 내가 내는 신청서는 백지일 수밖에 없다. 입대할 때의 주소지가 내가 가려는, 제일 행선지(行先地)다. 거기는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인 나의 뼈아픈 일시 기류(寄留)지 일 뿐이다.

모든 게 끝났다. 내 앞의 선임자도 내 동료도 부대를 떠나려는 사람은 없다. 나는 이미 졸개이니 독불장군이야 되지 않겠지만 독 졸은 난생(獨卒難生)이라는데 자초한 시련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넓은 세상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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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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