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 여러분, 여러분을 모신 이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부산진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차내 안내방송이 유난히 크고 위압적이다. ‘자! 여기가 당신이 원하는 그 부산이요! 원대로 해보시오! 그리고 후회하지 마시오!’ 나를 위해서 그 커다란 몸뚱이를 이끌고 밤새워 내려온 것처럼, 토해 뱉고 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가시고, 우뚝 솟은 기선(汽船) 굴뚝이 먹구름을 뿜어내고 있다. 배는 여기저기 산처럼 버텨 있다. 오른쪽 산비탈에는 바라크 집이 다닥다닥 붙어 온 산을 뒤덮고 있다. 바다와 산이 맞붙어 있는 부산인 것을, 포로로 잡혀 실려 갈 때나 제주도 훈련을 마치고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경관이다.
아! 여기가 부산이구나! 한 자유인으로, 한 방랑자로서, 가출한 한 소년 나, 이 부산을 바라보는 감회가 각각으로 변해간다.
기차는 멎었다. 모두 서둘더니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빈 객차 안엔 나 혼자인 것을 깨닫고 이제 턱 고인 왼손을 조용히 풀어 내린다. 손에 든 이 작은 보따리 한 개조차 맡아줄 사람이 없는 부산에는 왜 왔을까? 허공에 외친다. 비록 좁은 국토의 남단에 와 있지만, 마음은 지구의 남극을 밟고 선 것처럼 떨리고 상기(上氣)됐다. 서서히 복도를 걸어 나가는 내 머릿속은 온갖 상념으로 가득하다.
나를 써줄 곳은 없을까? 사생결단으로 덤벼드는 생존의 싸움터인 부두의 새벽이 벌써 들끓고, 굉음으로 새벽하늘을 열고 있다. 다행이랄 것은 역전에 설치된 장병급식소에 갈 수 있는 기간이 아직 남았다는 것만이 위안이다.
간이 세면대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 줄을 선다. 이럴 때 제일 귀찮은 것이 손에든 보따리다. 수첩과 세면도구, 몇 권의 책이 전부인 이 보따리는 내가 의지할 마음의 고향이고 나를 알아줄, 이 세상 단 하나의 연인이다. 허전할 때 손을 확인하고 심심할 때 손을 바꿔 쥐는 그런 연인이다. 단조롭고 가볍기도 하지만, 때론 우주를 싸 들고 다니는 무게를 느끼기도 한다.
역전은 한없이 넓어 보이고 사람마다 손에든 보따리가 금은보화같이 값져 보이는데, 그중 검은 교복과 교모(校帽)를 쓰고 무거운 책가방을 든 학생이 유달리 내 눈길을 끈다. 동시에 그 자리에 내 발이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고, 그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내 등에 무거운 압박을 느꼈다. 순간 뒤돌아본 내게 뒤의 병사가 턱 질로 앞을 가리킨다. 앞을 보니 내 앞은 저만치 비어서 줄이 끊겨 있다.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달려가지마는 그 학생 모습은 날 무척 괴롭히고 있다.
난 아직 배워야 할 때다! 그리고 커야 한다! 부럽고 부러운 그 모자! 미칠 것 같은 흥분과 나락을 헤매는, 양극을 오가고 있다. 어쩌면 좋으랴! 이 상황에서 공부? 얼토당토않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리로 향하는 내 마음을 붙잡을 길이 없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잡아 조언이라도 해준다면? 이 순간 뼈가 부서져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간절한 충동마저 인다. 죄다 헛것이다. 지금 난 보따리를 들고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려고 밥줄에 매달려서 따라가지 않는가?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현실이다. 난 창자를 채우기 위해서 영혼의 양식을 외면하고 있다.
해는 중천에 있다.
시골로 내려가는 군인들의 호주머니를 들여다보고 차린 노점 앞엔 어느새 나 같은 까만 제대복을 입은 제대군인이 얼마 남지 않은 여정을 마무리라도 하듯 주머니를 털어서 사과 궤짝 위에 놓인 과자봉지를 흥정하고 있다. 그는 집까지만 가면 될 버스값만 있으면 되니까, 호주머니를 털고 있다.
그러나 난 그럴 여유 없다. 얼마 되지 않는 담뱃값은 그 실 담뱃값도 어려운 형편에 무슨 짓을? 외면하고 만다. 대신 이 장사는 얼마나 남는가를 알아볼 양으로 접근했다. 그는 보증금을 맡기고 외상으로 갔다가 팔고 저녁때 남은 물건을 되돌려주며 정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얼마를 벌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담뱃값 정도란다.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리고 이 장사로써 언제 얼마를 벌어서 뜻을 펼 것인가? 체념하고 말았다.
삶의 물결, 건너야 할 물은 점점 깊어지고 물결은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한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