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외통궤적 2008. 8. 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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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3,020102 귀향

부산은 내가 길게 늘여서 갈 수 있는 이 나라 끄트머리에 있다. 더는 뻗어갈 수 없어서, ‘귀향지’를 경상남도로 정했으나 이 땅이 남극까지 이어졌다면 난 아마도 땅끝, 남극을 써넣었을 것이다.

제대자의 병적 관리를 하는 병무청엔 우리를 이해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 하나같이 본적 주소로 일관되는, 판에 박은 양식이다. 우리를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서식도, 배려도 전혀 없다. 속은 끓지만, 방법이 없다.

서식을 펼쳐 든 내 눈엔 불이 튀긴다. 그리운 이름이래야 할 귀향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몇 번이고 쓰고 싶은 고향마을 이름일 테지만, 내겐 어름같이 차기만 한 긴 칸으로 다가와 알른거릴 뿐이다. 그 위에 쓰는 펜 끝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헛돌기만 한다. 쓰려다가 생각하고 쓰다가 멈추기를 몇십 번, 버린 종이만도 여러 장이건만 아직도 신고서 칸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귀향’이란 낱말은 점점 커지고 공포의 활자가 되고 있다. ‘돌아갈 곳’은 아늑하고 평화로워야 할 어머니의 품이건만 오히려 날 엄습하는 동토의 바람처럼 내 마음을 얼린다.

만물은 천리(天理)를 따라서 난 곳으로 돌아가는 순조(順調)건만 이 이치를 깨닫기도 전에 궤를 이탈했으니 당하는 것은 그 역조(逆調)의 아픔을 감수할 일이다.

난 눈을 감고 ‘고향’의 글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쓸 수가 없다. 써도 알아보지 못하고 외워도 알아듣지 못하는 먼 나라 ‘미수복지(未收復地)’다!

‘귀향지’. 허울 좋고 그럴싸한 낱말이다. 어린이가 밖에서 놀다가도 지치면 돌아가는 곳이 어머니의 품이니 이 어머니의 품이 그 어린이의 고향일 것이다. 또 운동장을 뛰는 선수는 한탕을 뛰고 쉬기 위해서 돌아가는 자기 진용의 벤치가 곧 그 선수의 돌아갈 곳, 고향이다. 방랑자가 세상의 풍파를 맛보고 기진하여 돌아갈 곳도 역시 태어나고 자란 땅, 제 고향 집이다.

이 모두를 포함하여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갈 곳은 역시 자기를 있게 한, 자기가 난 산천의 흙일 것이다. 돌아감은 본래의 자기를 말할진대 돌아갈 곳이 없음은 자기를 잃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난 공중에 뜬 허무인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숨 가쁘다.

작은 사람은 가깝게, 큰사람은 멀게, 더 큰 사람은 더 멀리 돌아, 작은 원과 큰 원을 그리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다 같이 회귀하는 곳은 몸과 마음이 한곳인 것을 어렴풋이 알 즈음에, 정작 귀착점을 잃을까 봐 서먹하다.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고향 인연을 맺은들 마음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신고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범법자의 낙인이 찍힐 것이다. 가뜩이나 순탄치 않은 앞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입대 전 ‘도민증’ 상의 주소지인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로 적어 넣었다. 그리고 차츰 이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짧은 한 토막의 칸을 메우는 데 든 시간은 단 몇 초였지만 그 생각하는 시간은 긴긴 일 년의 세월과도 맞먹었다. 찬 바람이 몰아치는 한기를 느낄 ‘귀향지’의 글귀는 차츰 설렘의 봄날을 지나고 분노와 후회와 통한의 땀을 흘려야 하는 뜨거운 열풍을 맞게 했고, 마침내 오색으로 물들인 실낱같은 희망과 따스한 햇볕이 스미는 가을의 아늑함을 가져오면서, 비행장의 활주로보다 긴 ‘귀향지’ 칸을 메웠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제비는 하늘을 칼처럼 그어 치솟는데 가을볕은 따갑게 제비의 고향길을 재촉하고 있다. 제비야 너만은 느긋하여라!/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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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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