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뭉치의 화툿목을 보자기에 싸 들고 시장으로 나갔든 아저씨는 물건만 맡겨놓고 빈손으로 들어오고 있다. 물건값을 못 받고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이 많은 것 같다. 아저씨의 거동을 살펴 가며 초를 읽는 이즈음의 내 눈치가 빤하다. 쉽사리 짐작 가는 일이다.
되도록 일찍 일어나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오는 일이 일과처럼 된 것은 내가 방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고 우물물이 달려서 늦을수록 물 길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가의 맨 가장에서 자다가 통금(通禁) 해제의 고동이 울리면 죽은 듯이, 자는 척하다가도 소리 나지 않게 일어난다. 귀신같이 문을 열고 빠져나와야 하는,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 할머니가 내 이 몰골을 보셨으면 기절하실 것이다.
‘할머니 죄송합니다. 할머니! 저는 요, 지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하며 다진다. 무언가 이룩되기까진 어떤 고통도 이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다물고 열심히 하기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떤 사람도 호언 할 수 없는, 전쟁의 산물인 저마다의 역경이다.’ 이렇게 언제나 자기변호에 열중인 난 따로 포기하지도 않는 끈질긴 일면을 인정하고, 그 성정을 밑천으로 삼는다.
일이 없을 땐 땔감을 잘게 쪼개서, 되도록 불 힘은 세게 하고 나무는 적게 들이려는 내 노력은 끊이질 않았다. 이도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으로 살아가는 한 방편이다.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사회생활 초년병의 자세고 의무라 여겨서, 한편으론 내 노동의 대상을 찾지 못하여서, 오히려 수양(修養)의 측면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난 무엇이든 하지 않고는 불안하고 미안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런 근성을 갖고 있나 보다.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저씨에게 진지하게 의논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내 제안을 뿌리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상당량의 화투 제품을 이미 시장에 내다 맡겨놓고도 팔리지 않았으니 한 푼의 돈도 손에 넣지 못할뿐더러, 상품을 팔아 주기로 한 상인들로부터 몇 푼의 돈을 구걸하다시피, 겨우 연명할 정도로, 얻어오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같은 함경도 출신의 의사 부부에게 계를 붓기로 하고 우선 목돈을 마련하여 재료를 사 모았다. 나도 함께 물건을 구하러 시장을 배회했다. 그 귀한 쌀로 풀을 쑤어야 하고, 대지(臺紙)로 쓸 질긴 군용 지도를 사들이고, 화투의 그림 종이를 사고, 그리고 겉 지(紙)를 마련하면서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마지막으로 화공약품 점에 가서 필요한 약품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수용소에 같이 있다가 군대 생활을 한 부대에서 한 동료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
반갑다. 어물거릴 시간이 없다. 차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재빨리, 습관적인 소재 확인 절차가 이루어진다.
아저씨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다. 난 일자리를 부탁하고 그의 주소를 적었고, 그도 내 주소를 함께 적는 특유의 민첩함을 이때 나타냈다. 손을 놓고 돌아서는 그의 눈이 붉어 있었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난파선의 생존자, 둘은 이렇게 우연, 넓은 길에서 마주치니 오죽하랴!
종종걸음으로 아저씨를 따라붙었으니, 아직 아저씨는 낌새를 모르고 있다.
그날부터 내외와 나의 여섯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풀을 쑤어 석회와 섞고, 이 풀로 대지를 바르고 꽃종이를 붙이고, 절단기로 낱낱이 잘라서,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겉 딱지를 붙이는 ‘하청(下請)’을 주고, 다시 걷어 들여서 이번에는 걸레를 손에 들고 풀 묻은 겉 딱지를 일일이 닦은 후에 윤기를 더하는 화학약품을 칠하고, ‘롤러’에 한 장씩 밀어 넣어 반듯하게 펴고 다져진 걸 한목, 1월에서 12월까지 12장을 골라내는 손작업을 한다.
어린이 놀이로 안성맞춤일 이 작업이 인근 피난민의 목을 축이는 생명의 젖줄일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적당한 크기의 갑을 맞추어서 상표를 붙이고 이를 다시 큰 종이 곽(box)에 넣으면 제법 그럴듯한 상품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군복을 입었다. 짝짝이지만 군용 단화도 신었다. 이번에는 군용 손가방을 마련해서 그 속에 화투를 가득 채우고 바라크 집을 나섰다. 부부는 우려와 기대의 낯빛이 역력하다. 하지만 애써 감추면서 성공을 빈다.
난 자신하고 있다. 전우들은 내가 사회에 나가서 정말로 무사히 적응하기를 빌었기 때문이다. 나의 이 어설픈 행동을 사랑으로 받아 주리라고 믿는다.
전무후무한 기발하고 괴이한 짓, 전혀 예상 밖이니 참으로 반갑고 환호할 일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자괴지심으로 무력감마저 느껴지는 행위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는다. 그러다가 또 되뇐다. ‘세상에 보기 싫은 군복을 다시 입고 보기 싫은 얼굴을 다시 보아야 하고 미운 선임자들 눈총을 받으러 오느냐?!’ 고 손가락질할 것 같고, 뒤 꼭지에다가 삿대질조차 할 것 같은 무서운 장면도 눈앞에 전개되는, 상행열차의 밤은 설렘과 죽음의 터널로 밤새 이어지고 있다.
귀향(歸鄕)증은 모든 검문소와 위술병(衛戌兵)의 선망인 양, 무사통과였다.
전우들은 날 진정으로 반겼고 난 고무되었다. 얼싸안고 빙빙 도는 후배 조수들의 환호가 극에 달했다. 그들은 밤새워서 회람으로 광고했고 지휘관의 관심으로 이어지고 부대는 나의 이 행각에 호응했다.
난 비로써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비로써 이 땅이 살맛이 있는 땅임에 감사하고 있다. 이 물건이 내 것일 수도 있고 남의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전우들의 생각은 문제 되질 않는다. 날 반기는 것만으로도 지난 내 행적을 재확인할 수 있기에 더욱 반갑고 뿌듯했다. 내가 외면당하지 않았음은 내 지난날의 되돌림이니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하루를 묵는 동안 칙사의 대접을 받고 화투 값은 몇 배로 불려서, 마음대로 올려서, 한 후임자의 손을 통해서 내게 일시에 쥐어졌다.
난 감사했다. 이것이 내가 산 짧은 군 생활의 자화상이구나! 하고 안도하기도 했다.
사흘간의 체류와 전송이 각별했고 나는 그들의 건강을, 거꾸로 그들은 나의 ‘무운(武運?)’을 빌었다.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내 모습을 그들은 오랫동안, 그들 전우의 머릿속에 그렸으리라!
까만 학생복이 유난히 눈에 드는 새 아침의 대구 역전은 활기차다. 전화(戰禍)를 입지 않아 서울과 사뭇 다른 느낌의 예스러운 도시, 한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구의 거리엔 넘치는 학생들의 발길이 바쁘기만 하다.
글방 샌님 빗자루 들고 글쓰기요, 여염집 마님 상투 보고 얼굴 붉히기요, 고리장이 버드나무만 보아도 저 버들이요, 꼴머슴 풀숲 보고 어깨춤이듯 부럽다.
아직 난 학생의 신분을 그리나 보다. 그러기에 까만 제복만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언감생심’이라. 어쩔 수 없는 내 심사가 또 뒤틀린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니 빠른 체념이 내 몸에 좋다! 하늘을 올려 보고 크게 심호흡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하늘이 맑고 상큼하다.
뜻밖에 일찍 돌아온 나를 부부는 동그란 눈으로 바라본다. 그들이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은 모름지기 나의 무모하리만치 쉽게 행동한 나를 의심한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들은 내가 물건을 딴 곳에 처분하고 줄행랑을 칠 수도, 헐값에 팔아서 엉뚱한 곳에 탕진할 수도, 아니면 적당한 핑계로 차일피일 미룰 수도 있는, 갖가지 상정으로 후회도 많이 했을 것이고 이미 빌려온 돈에 대한 상환 문제로까지 비약해서 고민했으리라는 짐작은 가지만, 뜻밖의 반응에 오히려 내가 섬뜩하다.
방 안으로 들어간 난 즉시 그 오해를 말끔히 풀어주고, 오히려 그 부부를 경탄케 하는, 뜻밖의 결과로 전환 시켰다. 곧, 정반대의 표정으로 돌변하고 입이 마르도록 치하한다.
단 한 푼의 가욋돈이나 비용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제값의 몇 배를 고스란히 내어놓는 내 행동에 부부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이런 사람도 있나?!’싶은지, 어리둥절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잠시 분위기가 어색했다.
그들은 단지 시장 안 상인들의 계산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내 모든 거동이 파격(破格)임에 놀라고 있다. 더구나 제값의 몇 배나 되는 금액을 고스란히 내놓음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난 ‘일갈’했다. ‘아무런 뜻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날 시험할 따름입니다.’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그리고 나도 만족한다.
이제까지 침울하든 바라크 지붕의 검은 칠이 한낮의 볕을 받아서 회색으로 변해가고, 좁은 골목을 쓸며 지나가는 가을바람조차 시원하다.
보이는 모든 게 맑고 깨끗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