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

외통궤적 2008. 8. 1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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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7.020105 조수

택시에서 내린 선배는 대뜸 넓은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포장이 높게 둘러진 트럭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다시 정문으로 뛰어나가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어딘가를 훑어보고는 다시 쏜살같이 달려간다. 나는 물끄러미 바라볼 뿐, 어떻게 움직일 바를 몰라서 우두커니 서 있다.

곧 길 건너편 음식점에서 나오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와 마주치며 손을 잡는다. 구레나루 수염이 덥수룩한 그 사람을 ‘기사’라며 내게 소개시켰다. 그 기사의 나이가 아버지와 비슷한 연세로까지 보이는 데는 구리나루 수염이 그 몫을 하는 것 같다. 그는 가부(可否)를 정할 겨를이 없는지, 바로 트럭옆 자리에 나를 태우고 길을 떠난다. 선배는 적이 걱정되는 듯, 오른쪽입가의 근육에 힘을 주어 미소 짓는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내색이 역력해 보인다.

기름내 나는 난민수용소 촌을 벗어나서 싱그러운 벌판을 달리는 내 심장의 고동이 트럭의 엔진소리와 뒤섞이며 짜릿하다. 쾌감마저 가득히 차온다.  정체된 생활, 방안이 일터고 잠자리요, 식당이며 유일한 휴식공간인 화투공장(?)의 긴 날이 저만치 푸른 하늘 끝으로 사라지며 이제는 지난 일로 기억될 듯한, 환각으로 가득하다.

트럭은 ‘경상남도 합천’으로 간다며 서쪽으로 계속 달리다가 산길로 굽이굽이 접어든다.

‘서군, 내려서 뒤따라오게’ 비로써 첫 명령을 받았다. 아직 일제(日帝)의 버릇이 남아있는 기술계라서, 손아래사람을 ‘군(君)’이라고 부르는 방법 말고는 다른 호칭이 없기 때문이다. 호칭이야 무슨 문제가 되랴!

경사도(傾斜度)가 높은 굽이 길을 오르는 트럭의 속도가 느려서, 흔히 도적의 화물탈취가 있는 모양이다. 걸어가도 거뜬히 따라 가리 만치 느리게 가는 트럭을 이 산길로 굳이 모는 이유는 모름지기 질러가는 길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기름 값을 아껴 기사의 가외 수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고개 마루에서 쉬며 바퀴 점검을 하고는 다시 내리막길을 달린다. 거듭 생각하니, 패이고 할퀸 산판(山坂)길 같은 이 길은 모험을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이 즐길만한 험한 길임에도 굳이 이 길을 택했음은 아마도 내가 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개를 넘는 데는 감시원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리라.

한길 양쪽으로 드문드문하게, 낮은 초가집들이 뽀얀 먼지를 쓰고 논바닥 위에 올라앉아 있다. 집이라고는 구멍가게와 술집과 여인숙뿐일 것 같은 이곳은 군청소재인 '합천'인 듯하다. 아주 작은 고을이면서도 길이 사방으로 뚫려서, 이곳을 지나는 차량들이 꽤 있다. 여기까지 오는 몇 꾸러미의 짐을 부리고 간단한 점심을 먹었다.

야전군생활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하다. 담배 한대 피우고 곧 넓은 마당에다 차를 가져다 놓고 하부(下部)를 점검하더니 스프링이 부러졌다면서 교환하고 나서 떠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생소하여 서먹한데, 난데없이 차바퀴 밑에 들어가서 스프링을 들어 내리는 작업을 같이하자는 것이다.

서슴없이 따라하는 내 무모함도 문제이려니와 기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에, 나를 하나하나 가르치며 수리해 나가려는 것이다.  차를 들어 올리고 바퀴를 빼내고 다시 스프링 뭉치를 들어 내리는 작업이다.

헌데, 이 스프링을 다루어보지 않은 내가 그 무게를 가늠할 수 없고, 그 요령도 아직 터득하지 못했으니 둘이 맞들어서 내려놓는 과정에서 그만 한쪽으로 기울면서 드러누웠든 내 몸이 중심을 잃고 들고 있던 손과 함께 비스듬히 쓰러지고 말았다.

무언가 스치는 느낌이 들어 바퀴 밑에서 기어 나와서 치인 왼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새끼손가락의 첫마디의 손바닥 쪽의 뼈가 허옇게 드러나 있다. 곧 방울진 피가 샘처럼 솟는 것이다. 순간의 일이었다. 하늘이 노랗게, 까맣게 변하며 아득히 한 점으로 멀어졌다.  함께 나도 작아진다.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오며 아련히 엄마의 모습이 보이고 아버지의 등에 업히는 꿈을 꾸고 있다.

침대에 누어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기사는 말이 없다. 왼 손은 붕대로 칭칭 감겨있고 어깨띠까지 하고 있다. 오른쪽 얼굴이 근질거려서 손을 대어보니 덕지덕지 무언가 붙어있다.  물어보아도 역시 대답이 없다. 의사가 대답했다. ‘얼굴을 갈았다’는 것이다.

미루어보아 졸도다. 선 채로 앞으로 나무토막 스러지듯이 내 동댕이쳐져 얼굴을 땅바닥에 갈아 뭉갰나 보다.  ‘그만하기 다행이다’는 기사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살인의 누명을 쓸 번한 기사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있다. 그렇겠다. 만약 내가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뒤로 넘어졌다면 뇌진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후 기사는 일체의 말이 없다. 화물은 아마도 그만큼 배 송(配送)이 늦어질 것이다. 얼마동안을 안정을 취하고 난 뒤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트럭옆자리에 다시 태워졌고, 트럭이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한 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도 물을 수가 없다. 내 체력이 미치지 못해 힘을 쓸 수 없는 신체적 구조 때문이다.

‘너는 농사일을 하지 마라라’는 내 어릴 적 아버지의 말씀이 불현듯 생각난다.  옳으신 말씀이다. ‘나는 육체적 노동에는 적합지 않은 신체적 조건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씹고 곱씹는다. 그러나 어딜 간들, 아무 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조차 살기 힘든 이 세파를 한쪽 지느러미만 갖고 어떻게 헤엄 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 반문하며 칠흑의 밤을 헤맬 앞날에 빛이 될 만한 변이(變異)가 없을까? 생각한다.

빠져나갈 틈은 있을 것이다!  스스로 위로한다. 나는 이제까지 어려울 때마다 간절히 바라서 반드시 이룩되는, 신비스런 힘을 보아왔다.  어릴 적에 뽕나무 위에서 떨어졌어도 순간의 기도로 가지에 걸려서 살았고, 아버지의 징용장이 나왔을 때 나가시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서 결과가 그렇게 됐고, 내 진학이 또한 그러했고,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질병과 좌우의 이념대결속에서 살아남은 것이 그러했다.

그때마다 나는 간절히 빌었고 이룩됐다. 그리고 어떤 결과든지 겸허하게 수용하고 감사했다. 결코 거부하고 저항하는 일이 없었기에, 결과는 순탄하게 매듭지어졌다. 나는 또 믿는다.  ‘무슨 수가 있을 것’이라고.

선배는 허탈한 눈치다.  그리고 자기 신접살이 집에 나를 초대하고 위로했다.  나는 오히려 그 선배에게 미안하다. 한 바퀴도 돌지 못하고 되돌아온 나는 죽음의 맛을 보며 패배한 장수처럼 오히려 미안하다.

손과 얼굴이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내 몰골을 보는 그의 마음은 동료를 하나 잃고 외롭게 홀로 남는, 마지막 남은 한사람의 우군을 잃는 심경이리라! 필연, 나는 그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을 그는 이미 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살아남고 포연(砲煙)속을 뚫은 내가 호구(糊口)로 긍긍(兢兢)함은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닌가! 이러기 위해서 이 땅을 택한 것인가?

긴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이미 각오가 된 것이고 이런 것을 극복함으로써 새 장(章)이 다가올 것이라는 확신을 다지면서, 선배의 집을 나서서 다시 ‘신천동’ 난민촌의 화투공장을 찾는다.

내외는 반가이 맞았다. 그들은 나의 피나는 노력을 인정하고도 남는, 충분한 인사로써 안심시키고 위로하고 보살필 것을 다지고 또 다졌다. 그것은 그들이 이미 나의 진실을 알고 작게나마 내 덕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한동안은 아무 일도 못한다. 나는 언덕을 넘어서 한참을 걸어 나갔다. 노랗게 익은 벼이삭이 우리고향의 벼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익어 가는 가을의 정취가 고향마을과 겹쳐온다. 두렁을 거닐며 메뚜기 잡는 어린이의 손이 내 왼팔 왼손과 비교되면서, 자꾸 눈물이 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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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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