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1

외통궤적 2008. 8. 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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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6.020104 갈 길1

새까만 지붕으로 뒤덮인 ‘신천동’난민촌은 가을이 와도 가을인줄 모른다. 이토록 대지의 옷이 깡그리 벗겨진 불모의 땅으로 돼버렸다. 바늘 꽂을 만한 땅만 있어도 거기다가 땔나무를 쟁이거나 가재도구를 놓아 메워버렸다. 좁은 골목길은 끊이지 않는 사람의 발길로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다. 어딜 보아도 숨통이 트일 나무 한 그루 없고, 어딜 훑어도 계절을 알릴만한 풀 한 포기 없다.

 

길이자 방이고 길이자 부엌인, 길과 방이 마주 대이고 길 한가운데 부엌이 튀어나온 벌집 같은 난민촌의 가을은 방안의 틈새로 높이 솟은 하늘색으로 가늠될 뿐이다. 그나마 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풀 냄새와 나무 냄새는 넓은 지역으로 퍼진 기름종이 지붕 집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희석하여 오히려 역겹다. 거기다가 퀴퀴한 개숫물 썩는 냄새를 더하여서 사뭇 이국적이다. 우리가 살 곳이 아니면서도 엄연히 우리는 살고 있다. 싱그러운 나뭇잎 냄새와 풀 향기가 없는 이곳이야말로 그대로 지옥문턱이나 진배없다.

 

가을이 와도, 겨울이 와도, 도무지 이를 알려줄 전령이 없다. 시멘트처럼 다져진 흙바닥만이 삶의 현장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나마 땅위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싶게 옹색하기 그지없는 시설이다.

 

흙바닥조차 없었으면 숨도 쉴 수 없을 만치 조밀한 임시 수용소에서 긴 날을 보낸다는 것, 또한 거꾸로 가는 행로 같아서 영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튀고 싶다. 그리고 무언가 하고 싶다. 이 무력한 나날의 시간이 아깝고 억울하다. 진종일 한탕의 짐도 얻어걸릴 것 같지 않은 지게대열에 서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일 것 같아서 주저앉고 만다.

 

오늘은 무슨 수라도 내고 싶다. 내게 집 보기를 부탁하고 양주(兩主)는 계모임에 가버렸다. 문밖에서 동아일보의 연재소설‘삼국지’를 읽고 있는데 들어 닥친 선배, 홍 선배는 다짜고짜 가자고 하면서 잡아끈다. 사정이, 지금 집을 지키고 있으니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며 좀 기다리자고 설득한 다음 그 일의 내용을 알아보았다.

 

천일정기화물의 화물차를 타고 다니는 조수로 일한다는 것이다. 망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선배의 권유는 이렇다. 지금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 것만도 감사해야하며 그 자리도 지금 나서지 않으면 다른 대기(對機)자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과 경험을 하고 그 때 포기해도 지금처럼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결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내게 주어지는 이런 상황들은 언제나 돌발적이고 생각할 겨를이 없도록 촉박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어떤 마력이 나를 시험이라도 하는지, 고향을 떠날 때 부모님과 하직인사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도 남기지 못한 전과(?)를 되풀이하게 하니 어처구니없다.

 

그래서 또한 망설인다. 홍 선배는 ‘지금 근무 중에 왔으므로 당장 떠나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집의 잃는 물건을 내가 보상하는 조건으로 내 의사를 밝히고 떠나는 수밖엔 없다는 생각과 함께 장문의 편지와 보따리를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는 연배로서 대 여섯 살쯤 위의 연장자이므로 나를 생각하는 의무라도 있는지, 먼 길 ‘비산동’에서 여기가지 온, 사려 깊고 정 많은 사람이니 또 그는 눈물을 글썽인다. 그도 외로운 싸움을 하는 천일 화물의 계수(計數)원이다.

 

문을 지긋이 닫고 뒤돌아보는 내 옷소매를 선배는 살며시 잡아끌었다. 운명의 새날이 시작된다. 하늘이여 날 도우소서! 날 버리지 마소서!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날 도우소서!

 

눈을 또 감는다. 비로써 가로수의 물기 잃은 잎을 보았다. 모처럼 시냇가 둑 밑에 주저앉은 넝쿨 위의 분홍색 호박을 보았다. 가을이 무르익나 보다. 나는 아직 새파란데!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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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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