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이 어제의 피로를 풀기 위해 자유로이 휴식을 취하며 푸근한 하루를 보내는 한낮, 일보 변동을 기다리며 귀를 전화기에서 떼지 못하고 있든 내게 불청객 잡념이 끼어들어서 동공이 풀리기 시작했다. 턱 바친 양손의 힘은 점점 없어져서 손목이 뒤로 젖혀지고 턱은 점점 앞산을 향해서 버티고 있다.
어제의 훈련은 재미(?)있고 신나는 훈련이었다. 내 어릴 때 ‘지골?’ 외갓집에 갔을 때 그 동네 형들의 병정놀이를 코 흘리며 참관하는 ‘고문관’ 역일 때, 부러웠든 그 놀이를 다 큰 내가 어제야 비로써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가 참여하는 병정놀이가 신바람이 나다가 아예 미치고 말았다. 난 이렇게 꿈을 꾸며 훈련했으니 힘들지 않았을지라도 다른 병사 친구들은 지휘부에서 포 관측이나 하고 몇이 죽고, 부상했는지 알아서 병력 보충 자료나 만드는 나 따위가 견줄 수 없는 피땀 어린, 실전보다 힘든 훈련을 했으니 얼마나 피곤하랴! 싶다.
한편, 실전에선 승전이건 패전이건 다음 순간에 새로운 전투로 이어지기 ‘십상’인 것을 흘리고 있는 우리다. 어제의 병정놀이는 얼릴 때 병정놀이 꿈을 이루었고 전란을 겪으면서 전선의 전후방을 넘나들며 사병에, 포로로, 유전(流轉)하는 내 지난 일과 아무리 유사하게 유추하려 해도 걸맞아질 수가 없다.
전투는 상황 전개에 따라서 지극히 유동적이어야 하는데 ‘남북’, 양쪽 군대 어느 쪽도 불리한 상황에 대처하는 지침이나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전략이나 전술상으로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일 텐데 가장 귀중한 말단 단위, 한낱 병사에게는 얼버무리는가?
‘대공포 판’을 등에 메고 선두로 올라가는 병사가 부상(負傷) 하거나 죽었다면 다른 병사가 대신하지 않고는 진격이 정지 상태에서 적의 화력만 증강(增强)시킬 텐데 후속조치(後續措置)는 왜 없을까? 그래서 멋도 모르고 자꾸 기어오르다가 ‘대공포 판’의 위치를 기준으로 적진 쪽으로 퍼붓는 공대지(空對地) 포화나 지대지(地對地) 엄호(掩護) 포격에 희생된다면? 그런 상정(想定) 하의 사고 미연 방지는 알려주지 않는 것, 적의 화력이 강해서 전진할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은 왜 없는지! 실전을 경험한 모든 이의 한결같은 생각일 것이다.
전쟁과 개인은 뗄 수 없기에 개인을 백안시해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 개인을 말살한 전쟁의 승리는 승리이기 이전에 공멸(共滅)의 시작인 것, 부득불 전과(戰果)의 중심권에서 벗어나서 개인을 희생시킬 처지라면 그 개인이 그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냉철히 대처해서 적지에서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백 가지 염려를 더 하여, 사로잡혀서 정보가 누출될까, 하여 죽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쪽의 군은 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쟁이란 가능한 모든 상황의 집약이라고 보아서, 이미 그 누설 가능성의 한 가지 상황을 빠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사람도 잃고 전(투)쟁도 지는
어리석은 짓일 것 같아서 아쉽다.
한 가지 고려한다면 이기려고 하는 싸움에 김새게 지는 얘기를 왜 끼워 넣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지만 반드시 이기는 전(투)쟁의 보장은 언제나 반반일 것이란 생각에서 그렇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손목이 저려 옴을 느꼈다. 목덜미가 뻐근하다.
난 내 위치를 재확인하고 내가 그리는 궤적을 음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와 더불어 새로운 실전에 임했을 때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새로운 다짐으로 주먹을 쥔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치욕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