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던 ‘신천동’의 긴 겨울이 끝나는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라앉아 옆으로 퍼져 나간다. 개천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어려운 세밑을 이겨낸 난민 바라크 촌의 골목길이 촉촉이 물기를 뿜어내며 대지의 해동(解凍) 선물을 문 앞에서 받아내고 있다. 고드름 태 치는 소리가 심심하지 않다. 날씨는 확 풀려 봄기운이 완연하다.
나는 군복을 입고 간추려 꾸린 가방을 들고 노부부의의 배웅을 받으며 바라크 집을 나섰다. 달포 가량을 가족처럼 대해준 노부부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고 발을 옮겼다.
영화를 누리던 일본 사람들이 해방과 함께 일시에 알거지가 되어 콘크리트 다리 밑에서 밤새고 남쪽으로 떠나는 물결을 보았기에 뒤돌아보는 바라크 난민촌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겨우 하늘을 가렸을 뿐 개울가의 뚝 밑에서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이들이 패전 후의 일본인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서 무리에서라도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다쳤든 새끼손가락은 긴 흉터를 남기고서야 아물어 붙었고 갈린 얼굴은 푸른 빗금이 촘촘히 그어있긴 하지만 솔 딱지처럼 엉겨 붙었던 상처 딱지가 없어졌다. 거울을 보며 확인하고서야 떠날 마음을 굳힌 내가, 지독하다 싶어서 스스로 무섭다.
이만큼 머문 것도 끈기 있는 태도였다고 생각하며 긴 날을 지켜본 노부부에게 거듭 감사하며 멈췄든 발길을 옮기고 있다.
제대 후의 귀향 기간 석 달은 벌써 다 까먹었다. 이젠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줄이 똑떨어진 연같이 바람과 더불어 둥실둥실 주유(周遊)천하를 할 판이다. 다행인 것, 몸이 이만하길 참 다행이다. 병도 사람보고 달려드는지, 아직 내겐 병 고통이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지 않는다.
파란 하늘의 깃털 같은 구름이 내 마음을 상큼 하늘 저만치 올려놓고, 둥실 띄워 보낸다.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모든 게 친근해 보이고 정이 든다. 무아의 지경으로…. 눈이 감긴다.
‘거창’이다.
‘거창 사건’의 중심지 ‘거창읍’은 산중에 들어앉은 작은 분지지만 인근의 산골을 거느린 넓은 지역과 함께 사람이 많이 꾈 것 같은 지역이다. 따라서 사람들도 제법 웅성거린다. 가늠이 안가는 깊은 골이 수없이 많고 골을 따라 흐르는 개천도 그만치 여러 개 있나 보다. 얼른 보기에 대도시에 버금가는 도로망도 형성돼 있는 듯하다.
읍에서 다시 시골 버스를 갈아타고 면 소재지까지 가는 길은 험하고 위험한 길이라서 그런지 손님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버스는 장날만 운행되는 특별버스인 턱이다.
‘신성범’은 전에 대구에 왔을 때 장날을 택해서 올 것을 신신당부한 터였다. 그 박의 날은 운행 버스가 없어 큰 ‘감악산’을 넘어야 한다기에, 날 맞춘 오늘이 그날인 하룻날 장날이다.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천 년을 묵은 이끼를 덮어쓴 바위틈을 비집고 선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도록 빽빽이 들어선 산길, 꼬불꼬불 올라가다가 다시 돌아가며 골을 따라 내려간다. 과연 신들의 고향답게 자연보호 받는, 그 이름 ‘신원(神院)’이다.
어제, 저녁에는 모처럼 밥상과 함께 긴 이야기를 나눈 후에, 짐을 ‘신성범’네 윗방에 놓고 내가 쉴 곳인 멀리 떨어져 있는 공용사랑채에 친구 ‘성범’과 함께 가서 놀다가 그를 보내고 한 방에 있는 객들, 머슴들과 하룻밤을 지냈다. 여기는 밤새도록 군불을 지피는지, 방이 쩔쩔 끓고 있어서 굳이 이부자리가 따로 필요 없다. 크고 작은 목침만 수두룩하게 쌓여있다.
난 그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깊은 잠에 빠졌다.
하루가 지났다. 또 하루가 지났다. 난 초조했다. ‘신성범’은 교육청의 승인이 곧 있을 것이라며 기다리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내겐 용납되질 않고, 하루의 해가 금쪽같은 나에게 무위도식함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난 ‘신성범’에게 따졌다. 일주일 내로 소식이 없으면 내 갈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며 내 행동의 한계를 그어버렸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날 노자를 마련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질 않고 할 요량으로 덤볐다. 그리고 ‘신성범’에게 지게를 하나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신성범’은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내 성격을 아는 터라, 그대로 응해주었다. 점심은 그들이 의논했는지 어느 집에서 해내 왔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난 산판 길을 지게를 지고 올라갔다. ‘남들이 하는 일인데 왜 난 못하나? 단지 힘이 달릴 뿐인데, 그만큼 더하거나 자주 하면 될 터이고 일감만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니냐는 대단한(?) 마음을 먹었다.
난 멀리 튀고 싶었다. 그리고 마음껏 휘저어 보고 싶다. 옳다 길은 이 길밖엔 없다. 아무에게도 부끄러운 짓을 하기는 싫다. 손을 벌리기는 더구나 싫다. 이렇게 옹고집으로 살아가는 방법이 옳은 것으로 초 들지 않더라도 이미 난 많은 경우에 내 판단으로 행동했으니 새삼 다시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결행한다.
줄을 지어 올라가는 지게꾼이 짐 지고 내려오는 사람을 보내느라 길을 비켜서서 낯선 이상한 사람의 거동을 눈여겨본다. 어울리지 않는 지게꾼의 향방에 무척 관심을 보이는 눈치를 나는 읽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 필경 비웃을 것이다. ‘지게는 아무나 지는 줄 아느냐?’며 조롱하는 빛도 읽는다. 자격지심에서 얼른 본체만체하면서 내 갈 길을 올라간다.
이직 얼음이 덜 녹아 드문드문 성에가 엉킨 바위틈에서 하얀 모래알을 굴리며 솟아오른 옹달샘 물을 비껴가며 좁고 가파를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니 경사가 완만한 작은 턱에 다다랐다.
‘가막산’의 중턱에 차린 제재소의 요란한 발동기 폭발음과 나무 켜는 톱 소리가 온 산을 들썩이고 소나무 향이 코끝을 시원하게 벌려놓는다.
돌처럼 무거운 생소나무 각재는 물이 줄줄 흐르도록 젖어있다. 이제 막 켠 각재에 톱밥이 얇게 붙어있어서 촉감이 시루떡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무게는 천근의 무게로, 쌓인 더미에서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지게를 지고 일어날 수 없어서 다시 몇 개의 각재를 내리고서 다시 지고 일어나 보니 역시 일어나기조차 버겁다. 그래서 아주 절반으로 줄여서 지고 하산하는데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남들이 지는 분량의 반밖에 질 수 없다.
그들 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각재를 저 나르는 나를 보고 오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었을까? 생각만 해도 낯 뜨겁다. 그래서 ‘신성범’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극구 만류했던 것임을 알만하다.
그렇지만 난 종일 저 날랐다. 쉼 없이 움직였다. 큰길가에서는 목 상(木商)패가 내가 저 내린 나무의 분량을 그때마다 적어서 전표로 건네주고 있다.
돈이다! 돈표다!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순간이 싸여가고 있다.
며칠을 계속했다. 저녁마다 ‘신성범’이 날 데리러 왔고, 난 단출한 그 집 귀한 손님으로써 그 별미, 서리 맞은 고추에다 쌀가루 버무린 튀각을 대접받았다. ‘신성범’이 쉬는 어느 일요일은 ‘국시기’라는 별다른 음식도 맛보았다. 국에다가 식은 밥 덩이를 넣어서 죽이 되도록 푹 끓인 개밥(?)처럼 된 것인데, 죽도 밥도 아닌 ‘국시기’다.
그는 신접살림이다. 집안에서 지어준 세 칸짜리 초가집에다가 고작 이불 한 채 밥상 한 개가 모두 인성 싶은 살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늘 풍족한 듯 푸근하게 행동하고 의젓이 살아가는 그의 품성이 매우 고매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는 늘 풍요롭다. 그리고 서둘지 않는다. 느긋한 성격이며 게다가 중후한 기풍까지 풍기는 젊은이다.
그의 이런 풍모가 간결한 살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없는 내 신상의 흐름이 못마땅할 따름이지만 돌아다니다가 성공하면 다시 찾아와서 무슨 일이건 같이 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짐 꾸러미를 그대로 놓아두고 일단 내 갈 곳을 다시 가보기로 했다.
‘신성범’은 적이 미안해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 자기 고장에서 멀리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발버둥 치고 있다.
내 성품을 알고, 추호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나의 한 단면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의 심사가 편안하질 않다. 그래서 그곳에서 자기가 알만한 사람의 소개를 받아서 내게 건네주면서 멀리 가드래도 가기 전에 이런 사람을 꼭 한번 만나보고 떠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되도록 이곳에서 자기와 함께 있도록 하잔다.
난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 초조하고 불안한 나의 입지를 그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거기, 자기의 언저리를 어떻게든 벗어나지 않고 안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또렷이 드러나 보인다. 그래서 나더러 반드시 자기가 주선하여 소개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의논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직접 자기가 추진하는 ‘초등학교’ 교사는 당분간 어려운 듯이 내게 비치니, 난 여기를 벗어나 내갈 향배(向背)를 정해야 한다. 이는 누구의 만류가 먹힐 성질이 아니다.
난 떠나기로 했다.
어깨에 피멍이 맺히고 허리가 벗겨져서 피가 흐르도록, 나흘을 저 날랐다. 하지만 보수는 많지 않았다. 내가 갈 수 있는 서울행 여비를 충당할 정도였다.
짧은 인사로, 그는 반드시 되돌아오리라는 확신에 찬 행동으로 인사하고 있다. 그 실, 짐 보따리가 윗방에 그대로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리라.
그러나 난 단호히 그 큰 ‘감악산’을 홀로 넘을 참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