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

외통궤적 2008. 8. 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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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1.020109 방랑

‘신원면 양지(陽地)리’는 ‘양지 말’이란 이름에 걸맞게, ‘감악산’ 남쪽의 양지바른 곳에 있다.

산자락을 펑퍼짐하게 부채처럼 열어 펼쳐서 안아 들인 이곳에 따스한 햇볕을 받는 집들이 띄엄띄엄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엔 철 따라 따먹을 수 있는 실과나무가 이름 모를 나무와 어우러져서 우리네 여느 시골 마을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아직 결실의 시기가 멀어서, 새 볏짚으로 이엉을 얹을 때까지는 지난가을을 그대로 간직하려는, 집집의 지붕이 노란색을 띠고 다소곳이 숙여 있다. 순박한 인정을 담아 자연을 녹여가며 아름답게 익혀간다. 이런대서 어떻게 그 끔찍한 살육이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내 상상이다.

앵두나무 살구나무 배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거기다가 뽕나무 가죽나무 두릅나무 대나무 소나무,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지운 잎을 발밑에 깔고 겨울을 버텼다. 갖가지 나무가 바늘 같은 가지 끝에 물기를 올리느라 바람을 타고 분주히 하늘거린다. 이렇게 만물이 봄기운을 받아서 기지개를 켠다.

땅 밑에서 겨울을 보낸 씨앗이 지각을 흔드는 봄 소리를 듣고 두껍고 돌같이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보드라운 싹을 내는, 봄의 기운이 살며시 내게로 옮겨오지나 않을지!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파란 하늘을 올려 보며 생각에 잠긴다.

잎이 지면서 발가벗은 채, 찬바람을 맞아가며 겨울을 나는 초목의 신비스러운 겨울나기를 아직 깨닫지 못하여서 여기 이렇게 서있다. 나는 겨울을 나면서 두꺼운 옷을 몇 겹이나 끼어 입고 지냈다. 제자리에 오래오래 있으려면 초목과 같이 그 주어진 상태에서 적응하고 살아야 하는지? 숨 쉴 수 있는 숲이 한없이 넓으니 사시사철 열리는 결실의 땅을 벗해서 욕심 없이 입에 풀(?)칠만 한다면 저들 초목과 같을 텐데! 그렇게 되려면 내가 생각하는 바는 깡그리 잊고 하얗게 지우고서야, 그때에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부질없는 생각에 울적해진 내 마음을 달래보고 있다.

읍으로 질러가는 ‘감악산’ 오솔길은 ‘양지마을’ 사람들만의 전용 길인지, 많지 않은 사람들의 발길에 풀만이 누워서 흙조차 드러나지 않은 융단 길이다. 사람이 다닌 곳의 풀 길이 완연하여 길을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색다른 풀이 덮어 이어가고 있는 곳이 바로 길이기 때문이다.

산세로 보아서 산적(山賊)이 출몰할 것 같은 산마루를 넘었다. 억새 풀밭이 넓게 퍼져서 하늘을 틔고 있는 평탄한 곳에 허물어진 돌담과 내려앉은 서까래가 새까맣게 썩어 얽혀서 곧 소리 없이 쓰러질 것 같은 빈집이 보인다. 신원(神院?)의 비밀을 담고 있을 사연을 알아보고 싶은 유혹에 발길을 멈추었다.

오래전에 사람이 살다가 떠난 집인 것 같다. 집 언저리엔 말라 스러진 풀밭에 농사를 짓던 논밭임을 짐작하게 하는 둑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다. 샘물이 나는지, 질척한 곳도 있다. 오가는 길손을 상대로 물도 주고 술도 팔며 푸성귀도 가꾸고 또 물기를 모아서 다랑논도 만들어서 살았던 것 같다. 아마도 이 집주인은 공비(共匪)의 성화로 집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전화의 여진(餘震)이 이곳 오지(奧地) ‘감악산’의 ‘신주(神主)’를 몰아냈다. 그 유령의 집에 나를 보내어 신령(神靈)을 위로케 하고 있다.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되나? 내가 ‘감악산’의 풀숲에서 북쪽을 바라본들 북에 계신 누군가가 낌새라도 차릴 것인지! 나는 ‘이 자리를 빌려서 내 갈 길이 어디든지 내게 성한 몸만은 지탱하게 하여 주시도록’ 하느님께 빌고, ‘신원(神院)’의 터주에게 당부하고 있다.

엉덩이를 털고, 한참 동안 산비탈을 내려가니 게딱지 같은 집들이 흩어진 ‘한들’이 멀리 시야에 펼쳐지고, 우짖는 산 새소리가 내 발길을 끌어내린다.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는 시련의 산들, 이제 ‘감악산’ 하나를 넘는 꼴이다. 바동거려서라도 넘을 수 있는 산이면 얼마나 좋을까? 앞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넘을 수 없는 역경의 산을 얼마나 더 넘거나 비껴야 할지!? 보이지 않는 산타기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신발 끈을 동이고 죄듯 마음을 가다듬는다. 봄기운이 수목에만 국한되랴! 봄은 내게도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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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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