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외통궤적 2008. 8. 22.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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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혼미하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봐도 걸맞은 반려자를 찾아내기 어려울 텐데 번번이 상대의 코앞까지 이끌려서 분별력을 잃고 이렇게 어지럽다.

마력인가? 젊음 탓인가? 빙하의 골에 파묻힌 염통이기에 순간에 다잡아서 되돌릴 수 있다는, 차가운 이성을 자각하여 그러는 것인가? 나도 모르겠다. 보드랍고 윤나는 감정의 녹말을 거칠고 성근 이성의 삼태기에 담아 싸안으려는 내 행동이 안쓰럽다.

그저 감정이 이끄는 대로,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훨씬 부드럽고 고운 비단으로 싸서 펼친다면 감정의 녹말을 고스란히 퍼내 익힐 텐데, 그리하여 입술이 녹고 혀가 경련을 일으킬 요리가 될 것이지만 고집스러운 나는 이 순리의 이끌림을 외면하고 삼태기로만 내 마음을 담으려 한다.

인생은 감성으로 사는 것인데, 나는 인생을 업고만 가려 한다. 그릇된 생각인 줄 알지만, 나라는 인간의 허울이 날 이렇게 옥죄고 있어서 본심을 저버리고 허울에 싸인다.

애달픈 몇 달이 지났다. 사랑의 불기(火氣)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하얀 재에 묻힌 채 이성(理性)을 빙자한 허울의 다독임에 눌려서 속에서만 달아있다. 그러다가도, 금방 허울을 밀치고 불길을 일굴 그것만 같다. 올 성숙(成熟)한 초원에다 불덩이를 안은 채 내동댕이쳐진 나는 촉발의 위험을 무릅쓴 채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장날 후 사흘째 되는 날이다. 술 빚는 작업은 장날 다음날에 모두 마치고 다음 장날까지는 한가하다. 술 기술자는 술 배달 자전거를 타고 자기 논의 물고를 보러 가고 또 한 사람은 제 색시 보러 간다며 제 전용 술 배달 자전거를 타고서 제집에 다녀왔다. 또 다른 배달일꾼도 제 시간을 내어 어디론가 다녀오고 있다. 제일 한가한 이 날은 줄줄이 엇바꿔서, 한두 시간씩 자기 일을 보는 것이 관행화되어서 그런지 저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나다닌다.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 즉시즉시 배달만 하면 되고, 낟 술은 꼬마가 파는 것으로 돼 있다. 나 또한 장이 서지 않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한참을 걸어서 본가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날은 강아지와 수양딸 처자만이 유달리 반기며 나를 맞는다. 청 마루 색이 여느 날보다 까맣다. 마주 보이는 뒤란 쪽 작은 나무 문은 활짝 열려있어 문 저쪽 돌담에서 반사된 햇빛이 문지방을 회색으로 물들여서 반짝인다.

생각에 골똘하여서 길바닥만 내려 보고 걸어왔으니 눈인들 어찌 제대로 보였겠는지! 동공은 한껏 닫히지 않았겠는가! 망막에 들이닥친 마루청 색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함은 내 탓이거늘, 어두운 마루청만 이상하다 여기니 매사 이런 식인가 싶고, 눈을 비비며 내가 서 있는 자리에 적응하려 애쓴다.

흙바닥 길의 열기를 식혀주던 들 바람은 입추(立秋)의 절기를 지키는 문간에 붙잡혀서 옷 벗기고, 마루청 위를 스칠 때는 아예 시원하게 내 솜털을 스쳐서 간질인다. 마루청엔 아무도 없어 더욱 시원하다.

동그란 얼굴에다 동그란 눈망울을 굴리며 밥상을 내려놓는다. 팔월의 햇빛에 익힌 사과처럼 싱싱하게 물들어 양 볼이 건강의 표징처럼 팽만(膨滿)하고, 뒤로 빗어 묶은 긴 머릿결에 성근 손가락자국이 나 있다. 뒷머리를 묶은 초록색 ‘리본’은 풋사과를 매달은 줄기의 잎처럼 싱싱하게 달려있다. 처녀가 다른 날 보다 더 정성을 들인 듯, 모든 그릇에 뚜껑이 덮여있다.

마치 장차(將次) 자기에게 닥칠 몫을 미리 경험해보려는 생각이거나, 수양 엄마가 안 계시는 오늘만큼은 나의 마음을 떠보려고 하거나, 아니면 숫제 가상의 자기 신랑으로 정하고 하는 듯 정성 어린 차림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주머니는 안 계시냐?’ 침착하에 대하는 내 태도에 처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며 ‘오늘은 밖에 나가셨습니다.’라면서 머뭇거린다. 아마도 ‘그러면 옆에 앉아라.’라는 말이라도 있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늘 처녀의 태도는 여느 날과는 판이하다. 처녀도 느긋하게 머뭇거리며 맴돌 구실만 찾는다.

‘민자야….’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내 얼굴을 바라보며 반색하고 ‘에?’다. 특별한 주문이라도 있을 것을 기다렸다는 눈치다. ‘밖은 더운데 집은 시원하다. 그렇지?’ 할 말이 있을 수 없는 나는 날씨를 사이에다 넣고 마음을 비낀다. ‘예, 천천히 드시고 쉬었다 내려가세요.’ ‘민자’는 자기의 뜻이 성취된다고 여기며, 그 발랄한 성품을 거침없이 들어낸다.

점점 부푸는 가슴을 사랑의 풍선에 넣어서 힘껏 불고 있는지도 모른다. 터지는 것은 나는 모른다. 불어라! 바람아, 어서 빨리 들어가거라! 그리고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분의 가슴속에 묻혀있는 불씨에 불을 붙여라!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묻어 두었든 불은 쏘시개를 만난 듯 일고 있다. 상은 물렸다. 청량한 바람에 마루청의 높이는 점점 높아지고, ‘민자’의 풍선은 금방 부풀어서 마루청을 떠돌고 잡힐 듯이 알른거린다. 점심시간은 아직 남았으니 좀 쉴 양으로 사랑채에 들렀다. ‘민자’의 의미 있는 말에 못 이기는 체하고 사랑으로 들렀을 때,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민자’는 어느새 두툼한 요를 깔고 베개까지 곁들여놓았다. 이제까지 나는 여기서 등을 붙인 적이 없으므로 더욱 이상하다. 반듯이 누워서 꿈의 향연에 이끌린다. 내 눈썹 한 가닥이라도 까딱하면 맴도는 풍선은 금방 터질 것 같다.

불은 이미 타오르고 있다. 그러면서, 내 순수의 감정 녹말을 비단으로 싸서 펼쳐 놓느냐? 아니면 얼어붙은 이성의 삼태기로 주워 담아서 알알이 새 나가게 하고 나는 그저 빈 삼태기만 간직하고 또다시 회한의 그리움을 안은 채 한숨 지을 것이냐? 더욱이 부푼 ‘민자’의 가슴, 풍선이 밤새도록 떠돌며 몇 날이고 마루청을 헤매다가 제물에 바람이 빠지며 가라앉거나 마루청의 싸늘한 공기에 밀려서 훈훈한 바람이 이는 먼 곳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면 이런 갈등의 구조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삶이 오히려 비인간적임을 절실히 느낀다.

나는 풍선을 터뜨리지 못하고 그에 달린 실조차도 건드리지 못했다. 그것은 얄팍한 인간의 이기심과 얼어붙은 이성의 염통이 아우러져서 밀어낸 인간 사랑의 비참한 단면이다. 일생을 두고 털 수 없는 아쉬움, 회한의 늪을 헤맬 것이라는 생각도 하면서 당장 잠 못 이루고, 잠자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민자’는 마루청 위의 대들보에 걸쳐서 내려오지 못하는 자신, 풍선이 된 지금의 심경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재주를 한탄하며 긴 한숨을 쉬고 있다. 숨소리가 바람 소리와 함께, 내가 누운 사랑방의 비 가리 유리문을 스쳐서 들리고 있는 듯하다.

내가 대신하여 ‘민자’의 가슴을 열고 있어야 한다. 이변(異變)의 잠자리가 수술대가 되어서, 수술할 의사를 기다리다가 그만, 수술을 거부했으니 의사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돌아서야 했다.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수술대엔 왜 누었느냐?’고 외치는 의사의 표정이 ‘민자’의 얼굴과 겹쳐졌다. ‘민자’는 풍선의 줄이라도 잡기를, ‘민자’의 수술대에서 단순히 문진(問診)만이라도 허용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어유! 어쩌면 저렇게 양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자나?!’ 아주머니의 말이 귀에 들리면서 숨 막히든 풍선 잡기가 안정을 되찾고는 있지만, 불씨를 안고 불안한 잠을 자고 있는척하는 내 태도가 어색했을 것이다.

‘민자’도 부푼 가슴, 풍선을 잡아서 스스로 다독여서 바람을 빼고, 마루청 위의 밥상 놓였든 자리와 청 밑의 내 구두를 내내 바라보았을 것이다. ‘민자’는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성화를 이겨내느라 몸부림쳤고, 아버지의 시집보내기 발걸음을 지겹게 여겨오던 참이었다.

악업(惡業)을 하나 더 쌓은 것이 아닌지, 이승을 사는 내가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내 사랑은 어디 있는가? 내 사랑이여! 먼 곳에 있지만 말고 좀 더 다가오너라! 아니면 내가 쫓아가게 손짓하여라! 참 내 사랑이여!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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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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