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외통궤적 2008. 8. 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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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2.020210 신용

시험을 치르는 듯 짧은 시간의 아쉬운 일 년이었다. 때로는 감옥에 갇힌 듯 긴 세월의 지루한 나날도 있었다. 그 일 년 사이에 구석구석의 시골사람들을 두루 만났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거와 당선의 이야기 궤(軌)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같은 학교를 안 다녔으니 학교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고향 또한 같지 않으니 어릴 적 얘기를 나눌 수 있나, 이웃이 된 적은 더더욱 없으니 사립문에 얽힌 얘기를 할 수 있나, 도무지 선거이야기를 빼면 공동의 관심이 있을 일이 없다.

 

이야기를 잇기 위해서는 내가 걸어온 험난했던 발자국을 형용하며 일방적으로 떠벌일밖에 없다. 더군다나 남의 집 규수는 더욱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으니 여자에 관한 한 나는 형체만 더듬는 청맹과니나 다름없다. 에워싼 혈족이나 인척이 없으니 매파(媒婆)의 구실을 하며 다리를 놓을 사람이 있을 수 없고, 보장된 신원이 아니니 아무도 스스로 체가 되어 걸러줄 이 없다.

 

낱낱이, 빠짐없이 내게 밀려와서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이즈음이다. 나의 몇 가지 행동이 지켜보는 이에게 포착되어 그들의 기준에 달했던지, 선거의 결과가 좋아서 그 후광 또한 입을 것 같아 그러는지, 내 귀에는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들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운수업을 하는 일가 집, 처음 내가 이곳에 올 때에 인사차 들른 적이 있는 집의 꼬마 녀석이 느닷없이 날 찾아 왔다.

 

 

땅거미가 지고 전등불이 가로수 사이를 얽어 비치는 저녁이다.  꼬마 녀석은 헐떡이며 토하듯 뱉는다. 달음질을 했나보다. ‘엄마가 좀 왔다 가래요’. 꼬마는 나를 끌고 갈 작정인지, 문틀에 기대서 내 눈치만 보고 있다. ‘왜 오라는데?’ 내가 묻는 말에 ‘같이 오랬어요!’ 외치며 여전히 버티고 섰다. 무슨 사연이 있으려니 여기며 앞장서서 올라가는 꼬마의 뒤를 따라갔다.

 

 

늦여름의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다. 넓은 물받이가 달린 양철차양을 붙인 덩그런 기와지붕이 인근의 집들을 압도하고, 처마 위에 높이 달린 외등이 주위를 낮같이 밝힌다. 마당 한복판에 있는 물 펌프의 주위를 널찍하게 둘러 깔은 시멘트 물길이 이 집의 살림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몇 대의 트럭이 드나들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보드라운 모래가 촉촉이 젖어 깔려있다.

 

차와 사람의 드나듦이 잦아 그런지 풀은 한 포기도 없다. 그러나 우물 옆의 화단에 온갖 꽃이 피어있고 그 위에 전등 빛이 쏘아내려 화려한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파도가 밀려간 듯, 단단한 모래 위에는 타이어 자국 위에 무수히 많은 발자국이 찍혔다가 지워지고 찍혔다가 일그러져 우리 일상의 반복을 입체로 표현하고 있다. 일꾼이 식사를 하는 까대기며, 수리를 하기 위해서 지어놓은 수리공장 같은 창고도 한쪽에 마련되어 있다. 차는 오늘저녁에 두 대가 주차되어있다.

 

이 집은 사람과 물건이 함께 머무는 집이다. 친인척을 비롯한 사업상 관계하는 이들이 들끓는 집임을 비로써 알 수 있다. 주차장이자 수리 공장이자 살림집이다.

 

 

영문을 모르고 찾아든 나를 반기는 아주머니는 내가 뵈었든 분이니 그렇고, 옆에 서있는 규수는 낯설어서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엉거주춤 서있으려니 아주머니는 규수를 ‘조카’라고 소개하면서, 자기는 ‘얘의 이모’라고 하는 데, 개화된 일본풍 외모에 깍듯한 인사가 남다르다. 모름지기 일본에서 살다가 돌아오신 분 같기도 하다.

 

 

조카에게 ‘내가 얘기한 그 사람’인데 한번 ‘이야기나 나누어 보려무나.’면서 내 의견은 깡그리 후차적(後次的)인 것으로 일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러면서 ‘뒤 안에 평상이 놓였는데 거기에 가 앉아 있어라.과일도 상위에 있고 모깃불도 피워놓았다’ 면서 우리를 데려다놓고 곧장 저쪽 안방으로 사라졌다.

 

 

처녀의 이모는 내가 들으라고, 내 주위에다 말 할 데가 없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은 심기가 은연중 엿보인다.

 

 

편안한 분위기다. 결코 옥죄이거나 들뜨지 않는다. 우선 내가 불안하지 않다. 규수는 이미 나를 보았던지 담담하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는 내가 이제까지 본 어느 누구보다 편안한 외모다. 그녀의 소박한 차림이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듯하여 더욱 순수해 보인다. 어떤 암시라도 받고 나왔으련만 치장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이고 싶어 하는 자신에 찬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말끔하게 보인다. 까닭이, 아마 흐트러짐 없는 옷매무새 때문인 것 같다.

 

하얀 ‘브라우스’에 까만 치마가 보통의 것인데도 돋아 보이고, 처녀의 희고 고운 살결을 바쳐서 더욱 눈부시다. 처녀의 시원한 눈이 감길 때는 무대의 막이 내리는 듯 폭넓게 움직여서 보는 내 눈이 오히려 시원하다. 코끝은 날카롭지 않게 둥글고 입은 ‘쏘피아로렌’의 입처럼 또한 크고 시원스럽고, 손가락은 길고 가늘지만 마디사이의 살 붙임이 고르고 윤기 있어서 손마디가 없는 듯이 곧다.

 

팔다리가 길고 목 또한 뚜렷이, 어깨와 머리를 조화롭게 받치고 있어서 감추어진 어느 곳에도 굴절된 모가 없을 것 같고, 어느 한군데도 유선(流線)을 빼고는 비길 수 없도록 아름다운 선으로 이어지고 마무리된 듯하다.

 

 

앞에 있는 처자의 매무새와 빼어난 곡선은 나를 한없는 즐거움으로 이끌어가고, 규수의 ‘부라우스’ 어깨를 타고 흐르는 선 위에 비치는 전등 빛이 흰 실처럼 가늘게 빛나며 내 눈을 부시게 한다.

 

돌출(突出)과 예봉(銳鋒)이 없는 처녀의 맵시가 현란하여, 내 어릴 때 치마폭을 휘감고 쳐다보든 어머니의 상(像)을 느끼게 하여 평화롭고 고요하다. 어떠한 격랑도 잠재울 호수 같은 눈은 아무리 급해도 폭넓은 휘장(揮帳)을 내려 아늑한 장막을 만들어서 그 속에 모든 것을 포용할 것 같아 또 한 번 내 눈을 멈추게 한다.

 

 

그와 비겨, 소매 밖에 드러난 팔뚝에 시퍼런 심줄이 튀어나온 볼품없는 내 몸매는 비루먹은 말 같아서 민망스럽지만 상관하지 않고, 나 또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은 심경으로 자신에 꽉 차있다.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꾸미거나 수를 부린다면 이것이 후일의 내게 궁지의 늪이 될 수 있다는, 얄팍한 배수의 진도 생각하고 있다.

 

 

별자리가 처마 밑에서 자꾸 바뀌어 간다. 개 짓는 소리도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도 들리지 않고, 쉴 새 없이 공격하든 모기도 지쳤는지 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내 길고 험난한 이야기는 처녀의 마음에 연민과 동정이 일기도 하려니와 그만큼 밀려오는 불안도 점점 높아지기도 했을 것이다.

 

 

처녀의 선택을 우선하려는 나의 이성(異性)관은 뚜렷하다. 그것은 긴 날을 살아가는데 추호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오차가 없었다는 확신과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여겨야, 상대인 내가 함께 행복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 때문이다.

 

 

아직도 할 얘기는 마당에 깔린 모래알 만치 많은데, 지샌 밤이 오늘을 낳고 있으니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잠시 이야기의 끄나풀을 접어 사렸다가 다음날 다시 이어 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닷새 후의 오일장 이튿날 저녁, 같은 시간에, 이번에는 ‘가양동’ 작은 들을 적시는 봇도랑 위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반드시 담배를 피워 물기로 했으니 반딧부리와 다른 점을 미리 약속한다. 담배를 물고 뛰지 않기로.

 

 

이만큼이나마 신임과 신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끊기 있는 노력이려니 생각하니 또다시 고향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희로애락의 마디마다에는 작별 인사 없이 부모님 슬하를 이탈한 철없는 짓의 회한이 서려서, 오늘도 또 그 마디를 고뇌할 수박에 없다. 그런 속에서도 뼈를 깎는 인내로서 자존의 싹을 틔우고 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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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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