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내를 벗어난 논길을 걸으며 담뱃불을 붙였다. 켜지지 않는다. 라이터는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으나 이때까지 ‘자동 라이터’ 외에는 갖고 다니질 않는 내 까다로운 성품을 정확히 짐작이라도 한 듯, 오늘은 심술을 부려서 켜지질 않는다. 오늘따라 바지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는 썩 내 마음에 들게, 옷 속에 감추어져 있는 작은 장난감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야 그까짓 작은 주머니가 있든 말든 상관없겠지만 난 다르다. 오늘의 이 주머니는 내가 몇 번이고 ‘라이터’를 집어넣었다가 꺼냈다가 하면서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좋은 장난감 ‘라이터’ 집이 되어야 한다.
어두움이 깔려 있다. 나직이 깔린 지붕 사이에서 불빛이 하늘을 쏘지만, 멀리 나온 나에게 보이는 읍내의 불빛은 하늘의 바닥에 깔려서, 기죽은 빛으로 밀려서, 지붕 위만 겨우 밝히고 있다. 한 층 낮추어, 기듯 걸어가는 나의 행로를 멀리 떨어진 ‘개봉 리’의 가로등 몇 개가 발을 봇도랑에서 구해내고 있다.
다시 한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을 밝히고 발걸음을 옮기려니 약속한 담뱃불 생각이 나면서, 다시 초조한 몇 초가 가고 있다. 그 실, 몇 시간이나 되는 긴 시간이다. 다시 한번 ‘라이터’를 꺼내서 눌렀다. 불은 켰으나 담배를 꺼내질 않았다. 다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눌렀을 때 천우신조라던가, 불이 켜졌고 담배에 불이 붙었다.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손가락에 낀 채 팔을 저어 천천히 걸어갔다. 그나마 보이든 발밑의 논두렁길이 담배를 물고 빨 때마다 없어지고, 칠 흙이 되어서 한 발짝도 옮길 수가 없게 된다. 처녀를 부르는 담뱃불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빨 때의 불붙는 담뱃불에 초점이 맞추어서 그런지, 어둠에 앞이 가려 또 잠시 제자리에 섰다. 그래서 숫제 입에 문 담배는 빨지 않고 손가락에 끼고 걷기만 하기로 했다.
담뱃불이 사람을 부르고 있다. 하얀 물체가 저 멀리 오른쪽 읍내 모퉁이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직은 누군지 가늠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문 채 걷고 있다. 피울 수 없는 담배를 휘저으면서 서서히 걸어갔다. 길은 봇도랑 길 한길뿐이다. 만일 실패한다면 다시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이 처음이자 끝이라는 생각으로 오감을 동원해서 추적하고 있다. 자칫 내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면 일은 그르친 것으로 될 수도 있다.
처녀는 담뱃불을 확인하고서야 좁은 길목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나 보다. 만약 홀로 좁은 벌판의 봇도랑 길에 들어섰다가 마주친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떤 오해를 받을까 두렵고,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겠구나 싶어서, 움직이지 않았던 처녀의 행동이 그대로 수긍된다.
처녀는 나와 맞닥뜨렸다. 얼마나 흐뭇하고 반가운지, 얼싸안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성(理性)의 칼날이 호되게 내리친다. 내 감성은 쭈그러들고 이성만 팽배하여 말문을 연다. ‘저녁은요?’ ‘먹었습니다.’ ‘걸을까요?’ ‘….' 도식적이지만 가장 걸맞은 것을!
말재주도 없고 더군다나 주변머리 없는 내가 일생을 건 일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만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기엔 쇠딱지를 벗지 못한 철부지니 조심 또 조심하다 보니 처녀가 오히려 답답했을 것이다.
어디로 빠져나갈 데도 없고, 봇도랑 물이 가는 대로, 길 난 대로 따라 내려가는 수밖엔 다른 방도가 없으니 별수 없이 앞뒤에 나란히 길을 따라 걸어갈 뿐이다. 한참을 걸었을 때 한길이 나오고 그 한길을 건너서 다시 이어지는 둑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제법 넓은 둑이라서 둘이 옆으로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물길을 따라서 큰 내로 이어지는 강변에 닿았다. 시원한 강바람이 두렁 깎은 풀 냄새를 싣고 코끝을 스친다. 두 갈래의 길고 깊은 산골짝 물을 끌어 합치(合水)는 평원(平原)의 한가운데 제방에 이르렀다.
합수. 우리는 합수(合水)의 운명에 직면하는 각각의 물이다. 자연의 합수와 아우러져서 그 속에서 생육의 의미를 찾게 되리라는 생각에 미치면서, 오묘한 이치가 번득인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발 흐름이 여기 합수와 닿았으니, 필연으로 합수되리라 여겨 기쁘다. 그리고 희망 벅차 온다.
이것이 바로 환희의 충만 아닌가 싶다.
어느 방향을 보아도 멀리에 그만그만한 높이의 산이 별자리를 가로막는 선을 그어놓았다. 그 선의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서 이 냇물을 흘리고 있다. 수원(水源)이 동과 북에 있어 각각의 두 물줄기가 여기에 닿고, 발아래 모아 다시 굽이치고 흘러서 별들이 기다리는 남쪽 산봉우리를 향해서 반짝이며 흘러간다. 우리의 미래가 이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가슴 터질 것 같다. 중천의 달이 솔밭 너머 저 멀리 서쪽 하늘 밑 읍내의 인간 불빛을 눌러서 통째로 휘황한데, 이것이 우리의 앞을 밝히는 징후여서 마음 또한 올 때와 달리 청명한 가을날 같다.
처녀의 머리 향이 바람을 타고 향긋하게 코끝을 스친다. 탄력 있는 손목, 지구의 중심부인 남북 회귀선 사이를 잡은 무게로 기쁨이 다가왔다.
처녀의 긴 이야기가 별만큼 많다. 처녀가 이곳에 온 사연도 내가 이곳에 온 사연도, 모두가 이 합수의 물을 바라보며 합수되기 전의 여울목 물소리를 잔잔하게 내고 있다.
처녀는 동쪽에서 흐르는 개울의 여울물 소리를, 난 북쪽에서 흘러내린 개울의 여울 물소리 내면서, 합하여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별빛을 받아 여울지며 흘러간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