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

외통궤적 2008. 8. 2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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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꼬’양이 머무는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나는 영업장을 통해서 들어갔다.내 인기척 첫마디에 ‘에이꼬’의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 보다 먼저 들어와 있는 ‘에이꼬’의 여자 친구가 부엌문이 달린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아 있다가 인기척을 듣고 일어나고 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손을 내려 치마를 쓸어내리고 있다.

 

심부름을 하는 ‘에이꼬’의 이종 동생 꼬마의 전갈을 받고 왔는데, ‘에이꼬’는 자기친구 에게도 약속을 하고서 나를 불렀는가보다. 안전장치를 마련했는지, 나를 보아달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의외다.

 

그 덕에 나도 시야를 넓히고 있다. 벽이 삼면이고 한 쪽조차 태반이 문이다. 벽을 지고 앉아 발을 뻗으면 맞은편 벽에 발이 닿을 듯 하고 다른 한 벽은 뻗은 발끝이 방 한가운데 이르는 좁고 기다란 작은방이다.

 

무릎을 바닥에 깔고 앉으면 가운데 밥상 하나가 들어갈 만한, 길쭉한 방의 한 쪽 길이로 내가 앉고 둘은 좁은 쪽 벽을 등지고서 맞보고 앉았다.

 

둘은 상반되는 성격, 자란 환경의 탓인지 외모와 골격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에이꼬’의 친구는 하관이 빨고, 그새 세상의 풍상을 얼굴에 새긴 듯 윤기를 잃고, 매만진 흔적이 알아볼 정도로 드러나 있다.

 

왜소하여 날렵할 것 같으나 어딘가 예리한 비수를 감추고 있듯 번득이는 품이다. 게다가 동작마저 뱁새같이 촐랑인다.

 

그에 반해서 ‘에이꼬’의 얼굴은 천만 배를 확대해 보더라도 주름하나 없을 것처럼 연하게 펴져 있다. 두드려도 손가락이 퉁길 것 같은 앳된 티를 갓 벗은 볼, 닿으면 탄력으로 흡수하고 곧 저항과 수용으로 밀어내어 제 모습을 회복할 것 같은 깊이를 간직한 볼, 천연의 숙과(熟果)처럼 향기롭다.

 

 

세상을 모르고 자란 온실 꽃처럼 여려 보이면서도 풍만하고 여유 있는 ‘에이꼬’는 황새처럼 동작이 크고 더디어서 나를 더욱 매료시킨다. ‘에이꼬’는 어떤 내외적 충격에도 버틸 수 있는 무게와 소양을 갖추고 있다는 듯이 시원한 그의 눈시울을 내리깔았다가 천천히 올리며 미소 짓는다.

 

 

가로수의 잎이 지고, 문풍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시골의 초겨울이다. 어디선가 저(箸)가락 장단에 실은 노래 소리가 길을 건너 골목을 휘젓고 우리 방 문풍지를 뚫고 귀를 뚫는다.

 

겨울은 좁은 시장바닥에서부터 깊어간다. 간간이 나는 연탄 냄새가 초겨울 밤, 이웃의 친구와 모녀를 느끼게 한다. ‘에이꼬’의 친구는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단다.

 

 

여름 한철 무성한 초목과 북적이든 사람, 잡다한 물건들이 바람을 막고 소리도 막고 생각도 어지럽혔다. 이제 앙상한 나무는 바람을 피해서 더욱 엷어지고, 처 놓았던 휘장과 물건이 집안으로 숨고, 거리를 헤매는 사람들도 집안으로 끌어드렸으니 확 트인 공간이 모든 음향을 그대로 드러내 전하는 음소투과(音素透過)의 철이다.

 

내 소리도 여과 없이 전해지고 ‘에이꼬’의 소리도 부딪침 없이 내 귀청을 때릴 것이다. 그러나 ‘에이꼬’는 친구를 불러들여 그녀의 경험과 예지(叡智)를 빌려서 내 소리를 들고 내 행동과 눈빛을 보고서 판단하여 ‘에이꼬’에게 솔직하게 전해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내심은 아무런 요동이 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 안에 세운 장래의 설계를 내 태도의 분장이나 변장으로 덧칠하지 않기로 한 각오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감각은 파장을 일으키지 않고 안으로 잦는다.

영원히 숨겨야할 삼각양변의 꼭지점 위에서, 양변에 전달되는 파장을 없애며 동떨어져서 비교해야하는, 나름의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있다.

 

‘에이꼬’의 친구에 관해서는 간접으로 내게 간간이 들려온 바 있다. 그녀에 관해서 자세히는 이미 ‘에이꼬’를 통하여 듣고 있었던 터이지만 그 실상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보이는 바대로 가늠해야하는 계기(契機)는 이제 마련되고 있다.

 

‘에이꼬’의 친구는 자기를 감추고 나를 자기의 입장에서 관찰하려한다. 그 명색을 친구‘에이꼬’에게 도움을 주는 것에 빙자하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대로, 술도가의 상노인이 ‘에이고’친구의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인 ‘한 노인’을 통하여 그들끼리 한번 오고간 이야기를 간접으로 들은 터라, 오늘에서야 그 당사자를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에이꼬’는 담담히 나를 친구 앞에 등장시켰으니 내가 올바른 판단으로 처신해야하는 또 하나의 보이지 않는 짐을 지고 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이미 내 마음에 정한 이상형은 흔들릴 수 없지만 감정을 표출할 수 없는 피차(彼此), 누구든지 간에 상호 관계적 행동에는 어쩔 수없이 민감하리라는 예측을 할 때, 살얼음을 딛는 듯 당장 조심스럽다.

 

가장 쉬운 화투놀이를 하면서 서로의 격의를 좁히고 상대의 심성을 저울에 올려놓는다.  응당 나의 일방일 수 없는 것이기에 백중으로 조정하며 승부를 끌 수 있는데 까지 끌고 가는 것이 나의 위치 같다.

 

어지간히 시간이 지났을 때 ‘에이꼬’의 친구를 시켜 먹을 것을 사러 보내면서 ‘에이꼬’가 잃은 돈을 지갑에서 꺼내려고 일어났을 때, 나는 온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보았다. 이변이다. 요술쟁이를 보는 것 같았다.

 

따뜻한 그의 방에 깔린 헐어진 담요의 가장자리 위에 그녀가 자리했다가 일어섬으로써 그 담요의 가장이 드러나서, 청아한 그이 성품을 돋우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현실인가? 나를 신뢰한 그 믿음, 격식 없이 맞으려는 그이 소박하고 진지한 태도, 아마도 이런 행동은 가식을 모르는 소탈한 품성(稟性)이 아니라면 어림없는 파격이다.

 

‘에이꼬’는 양말을 신지 않았다. 편안한 그의 마음을 웅변하고 있다. 내 마음 또한 편안해진다. ‘에이꼬’는 자신의 내면을 가릴 육신을 아무리 현란한 물건으로 감싼다 해도 바탕은 숨길 수 없다는 확신에 찬 태도를 일상에서 표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느끼기 전에, 벌써 내 마음은 도가니 속에 들어간 갖가지 성분의 금속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녹아버린 후였고 도가니에서 용해된 상념이 이 한 가지 사실로 인해서 한가지생각, 불순물이 제거된 순 금괴로 찍혀서 굳어지고 있다.

 

 

‘에이꼬’가 헌 군용담요의 끝자락을 밟고 일어섰을 때 그의 맨발은 내 눈 바로 밑에서 ‘에이꼬’그대로를 들어내고 있었다. 조각품 같은 발은 발이라기보다 ‘에이꼬’의 얼굴처럼, 발과 머리가 맞바꿔진대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엄지발가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이꼬’의 엄지발가락은 발가락이기 전에 ‘에이꼬’의 마음을 담은 주머니 같았다. 하늘을 향한 얼굴에는 선한 눈이 깊어있고 땅을 향한 엄지발가락은 또 하나의 다른 ‘에이꼬’를 감추어 놓고 있다. 이 엄지발가락에서 그녀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가로지기로 지그시 누른 듯이 패인 마디, 줄음을 감추려 볼록하게 올라온 발가락 살이 ‘에이꼬’의 탄력을 가늠케 하고, 발끝에 달린 연분홍색 엄지발톱이 ‘에이꼬’의 건강을 말하고 있다.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는 엄지발톱을 에워싼 주위의 피부가 틀에 잡혀서, ‘에이꼬’의 마지막을 예쁘게 마무리하고 있다.

 

 

내 일찍이 보지 못한 엄지발가락의 탱탱한 첫마디가 나를 황홀의 경지로 몰고 간다. 내 엄지발가락의 기준으로만 형상화 고정된 관념을 ‘에이꼬’의 엄지발가락이 엄청난 마력(魔力)으로 부셔버렸다.

 

‘에이꼬’는 다시 제자리에 앉고, 친구는 무엇인가를 사러 밖으로 나갔다. ‘에이꼬’가 벽에 걸어놓은 웃옷에서 얼마의 돈을 꺼내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엄청난 희열(喜悅)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그리고 무한히 뻗는 탐조의 불빛을 ‘에이꼬’의 발가락에 퍼부었다. ‘에이꼬’의 양 발의 엄지발가락 속에 내 전부가 축소되어 들어가고 있다.

 

 

발치에 있는 괘종시계가 아홉시를 가리키고 있다. 말문을 열지 못하는 내 심경을 ‘에이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여자 앞에서 움츠리는 나를 어떻게 여겼는지는 후일 나타낼 것이다. 당장은 ‘에이꼬’가 주도하고 있다.

 

 

‘시간이 벌써 저렇게 ?’ ‘에이꼬’의 아쉬움은 깊고 커다란 눈에 담겨서 내게 전해온다. 열시면 통행금지가 되니 길어야 삼십분이 고작이다. 내 눈은 감추어진 ‘에이꼬’의 발쪽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돌아갈 시간이 벌써 다 되었습니다.’ ‘에이꼬’의 눈에 내 모습을 뚜렷이 박아 넣었다. 이윽고 친구가 돌아왔다. 먹는 둥 마는 둥, 머릿속에서 온통 엄지발가락의 볼록 살이 지워지지 않는다.

 

침소(寢所)로 돌아온 내 귀에 통금‘싸이렌’ 소리가 여느 날보다 카랑카랑하게, 오늘의 나를 내일로 이어주고 있다. 내일의 할 일은 ‘에이꼬’의 엄지발가락을 영원히 새겨 넣을 내 가계(家系)를 찾아 만들어놓는 일이다.

 

‘에이꼬’와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앞날을 다져야겠다는 생각에 골똘하다. 우선 호적을 만들어야한다.  나는 고향에 호적이 있다. 그럼에도 또 만들어야 하나. 그 호적은 무엇이고 내가 새로 만들어야 하는 이 호적은 무엇인가!!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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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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