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

외통궤적 2008. 8. 25.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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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7.020219 변혁

일장춘몽이라던가, 꿈을 가꾸어서 한 송이 나팔꽃이라도 피워 보려든 부질없는 욕심은 뭇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면서 내 눈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낮 한 때 시위대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갖은 구호판을 들고 좁은 거리를 휘젓더니 어둠이 깔리면서부터는 몽둥이와 연장을 든 폭도로 변하였다. ‘당 간판이 붙어있는 술도가를 부수러 가자’며 ‘동동’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몰려서 웅성거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정보는 살생의 위험까지 알리면서 빨리 은신하기를 재촉하는 급박한 전갈이다. 손쓸 겨를이 없다. 올라올 폭도들의 군중심리를 조금은 알고 있는 나로선 일단 그 예봉(銳鋒)만 피하면 될 것 같아서, 직원들과 함께 술도가의 마당 귀퉁이에 있는 나무 가리 뒤의 담을 넘어서 그 담 밑에 숨어서 동정을 살폈다.

 

이미 재빠른 일꾼들은 셋이나 빠져서 어디론가 도망가고, 가장 순진한 배달머슴 이 씨와 저녁마다 잠만 자러 내려온 농사머슴‘삼판이’와 산전수전 다 겪은 나와 셋이 도가를 지키고 있다.

 

아니다. 술도가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각오는 이미 되어있다. 충직한 내 성품이 의협심으로 변하고 있다. 성난 그들은 자기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선봉자가 외치는 대로 손짓하거나 앞에서 가는 대로 따라 갈 따름인 그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기에, 그 첫 짓이 사람을 찾거나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 걸로 보아서는 특정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일어나서 다시 담을 넘어서 술도가마당으로 들어가는 사이에 폭도들은 벌서 창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그들은 내일 팔기 위해서 걸러놓은 술이 들어있는 큰 독 세 개를 깨는 요란한 파열음에 개선장군처럼 기세를 올렸다.

 

선두는 술 바다가 된 마당에 발을 적시면서 깨진 독 쪼가리와 술통들을 우물에다 처넣고 있는 중이다. 우물은 술통으로 순식간에 메워졌다.

 

기세는 한풀 죽었다. 그것은 바닥이 술로 흥건하게 고였고 그들의 파괴 욕을 어지간히 채웠기에 수그러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과격한 사람은 있게 마련인가보다.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부수는 패 중에는 주먹만 한 자물쇠가 달린 발효실의 문에 매달려서 문을 부수려고 한다. 대드는 몇 사람은 손에 망치를 들고 자물통을 부수려 한다.

 

나는 달려들었다. 그리고 손을 잡았다. ‘여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다!’ 여기선 물러가자! 이젠 내가 시위대의 선봉인 것처럼 그들을 만류설득 했다. 그들은 내 말을 들었다. 군중은 언제나 선봉의 뒤를 따르는 특질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중에 나를 아는 사람이, 나를 해칠 의사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망치에 맞거나 그와 결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일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타고난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이러는 사이에 별도의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을 했던지 아니면 평소에 감정을 갖고 있었던지, 시위대 일부가 ‘국실(麯室)’에서 ‘발효(醱酵)실’로 이어지는 벽을 허물고 들어갔다. 누군지 모르지만 마음 놓고 괭이로 흙벽을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내가 자물통을 지키고 있는 사이에 이런 일이 뒤쪽 구석에서 벌어졌다. 아마도 우리 중에 누군가가 있어서 그들을 유인했던들 먹혀들었을지도 모른다.

 

발효(醱酵)실에 들어가며 숙성되는 술독을 차례로 깨던 그들은 푹푹 빠지도록 괴어 흐르는 숙성중인 술 원료(주료;酒醪)의 산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서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그들 자신의 목숨이 오히려 걱정되었나 보다. 더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 도가를 확인하고서야 그들은 ‘죽전본가’로 가는 것이었다.

 

당하는 입장에선 피아(彼我)를 구분할 필요조차 느끼지를 못했다. 술도가는 이미 부서졌고 내가 향한 곳은 ‘죽전’의 본가였다. 본가는 이미 아래 체의 초가지붕에 불이 타오르고, 본채엔 사람들이 올라가서 붙고 있는 불길에다가 동네사람들이 이고 온 동이물을 부어 끄고 있었다. 그들이 한바탕 들볶고 지나간 자리는 어디든지 폐허로 되었다.

 

 

삼월십오일의 대통령선거에서 펴놓고 옳지 못한 방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민주화의 기세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대통령이 하야하고 부통령과 그 가족은 아들의 자결결행으로써 고비를 넘기면서 그 세가 지방으로까지 퍼져 내가 있는 시골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민주 이름의 물결 한가운데를 피할 수는 없다. 물길에 들어서서, 정치의 주도세력이 저 상류의 물길을 막아서 다른 곳으로 틀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터진 것이나 진배없다.

 

 

해방 후의 면장 집 부수기의 의미 모를 ‘미친 짓’을 보았고, 육이오 전란 때 대전의 한 학자의 집을 짓밟으며 흩은 ‘무산자의 한풀이’ 현장에 있었던 내가 오늘 민주화의 귀신들이 춤추는 굿판에서 날뛰는 ‘무당의 짓’을 보았다.

 

 

이념의 갈등이 악을 불러들여 인간 골수에 박혀 찌든 발작광기(狂氣)에 불을 댕기는지, 사변(事變)의 언저리엔 언제나 파괴의 그림자가 붙어 다닌다. 그런데도 가해자의 실체는 언제나 연기와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짧은 내 삶에서, 사변을 통하여 삶에 드리운 인간심성을 보고 있다. 사람에게 숨어있는 또 다른 사람모습을 발견하고 있다.

 

평소에는 전혀 없던 행동이 세상이 바뀐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서도 무리의 심리에 휩싸여 가차없는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인간의 숨은 내면을 보면서, 그들이 또 다른 압제에 굴종(屈從)하는 이중성을 보고 있다. 그들은 또 굴종의 삶을 살면서 파괴의 이끼에 습기를 더해 갈 것이다. 누구보다 오래 인연을 맺었고 내 몸의 일부처럼 더불어 살았던 술도가의 창업직원은 깡그리 도망가고 없었다. 일신의 보호가 그 이유겠지만 보기에, 의협심이나 의무감이나 양심 따위를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다.

 

오늘, 변혁의 현장에서 나는 인간의 명(明)보다 암(暗)을 더 깊게 보고 있다. 그들은 며칠 후에 온갖 너스레를 떨면서 그들의 공을 내세울 것이다. 아무도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알았을 테니까!? 그리고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던 그대로를 되풀이 설명하려는 내 마음은 그들과 다를 바 없으리라는 생각에 미치자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기로 마음먹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변혁의 현장에서 내가 겪은 터럭같이 작은 교훈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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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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