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없이 술에 취한 사람을 보게 되는 일상의 하루가 또 밝았다.
오전에 도가를 찾는 사람은 대개 말술 배달을 주문하거나 주전자나 됫병에 담아 가는 데 반해 오후에 오는 사람은 도가(都家)에서는 먹고 갈 수 없는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꼭 술판을 벌인다. 으레 도가 사람을 잘 안다고 하거나 친인척과 ‘민의원의원’을 핑계 대는 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술을 먹는 요령이 비슷하여 반드시 도가에서 일하는 사람을 끼워 넣어서, 마치 자기들은 얻어먹는 것처럼 꾸미게 마련이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술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는 체하자니 자연 판매대를 뛰어넘어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서 수작하거나 사무실로 들어와서 노닥거리다가 슬그머니 돈을 내민다. 돈을 안 받고 공술을 주면 되련만, 그렇게 되면 매일 이런 판으로 난장(亂場) 됨이 번하다. 또 돈을 받으면 아름을 앞세운 이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일게 하는 것 같아서 또한 어렵게 한다. 외면하면 의원을 팔며 지난날 자기의 공을 들먹이고 삐죽거리니, 막상 당하는 우리도 모르게 정치를 하는 양 대범해지며 포용하여 생각을 바꾸게 마련이다. 배워서 좀 안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서나 오히려 질서를 망가트리는 사회 일면을 여기서 다시 보며 많은 것을 느낀다.
특별히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면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아는 척하면서-그는 날 알 테지만-접근한 젊은 친구는 사무실로 들어와서 점잖게 이야기하다가 돌아가서 다음날 오고 또 다음 날 오면 그만 구면이 되는 것이다. 한데, 이때부터 술 한 되를 산다. 혼자 마시기엔 좀 멋쩍은지, 못 마시는 날 끌어드리려 하지만 난 워낙 못 마셔서 거절할라치면 그때는 잠시 쉬는 일군을 부른다. 환심을 얻으려고 그러는지, 술 마시는 분위기를 살리려 그러는지, 합석하도록 슬며시 유인하여 판에 어울리게 한다. 이런 때 규칙을 지켜서 쫓으려면 조금은 냉정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렵다.
저는 날 안다며, 의원을 지지한다며, 내 입에서 말이 나오기 전에 내 입을 봉합하고 몸짓이 있기 전에 주저앉힐 재간을 부리는 것을 보면 그가 배웠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서 역심(逆心)도 인다. 그러다가도 배운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런 자리에서 비굴하다 싶게 친절을 가장(假裝) 해가며 노닥거리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단지 그가 일자리가 없어서, 시간을 죽일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렇게 꾀부리는구나 싶으니 내 생각을 다시 가다듬게 한다.
그는 일류대학의 공학박사이면서도 늘 부인의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갓 젖 떨어진 머슴애를 안고 사무실을 찾을 때, 난 일시적으로나마 반사적 위안을 받게 되어, 역시 그의 술판이 내 인생의 반면교사 노릇도 한다. 어디를 보나 그는 나보다 월등하고 좋은 조건에서 출발했으련만 지금은 이렇게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나하게 취해서 입에 게거품을 내며 식자(識者)의 변(辯)을 읊어대고 있으니 민망하다. 그는 오히려 날 부러워하는 눈치다. 차라리 홀로 되어 가고 싶은 곳에 가서, 공장 문을 두루 두드리고 싶은지도 모른다.
굴곡을 외면하고는 살 수 없는 사람마다 인생길에, 누가 누구를 부러워하고, 얕볼 수 있을까 싶어서 또 깨닫는다.
난 이렇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나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내 모르게 배어있다. 이런 습성은 나를 붙잡아서 바르게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지지대가 없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아예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버릇으로 해서 이처럼 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전공한 금속 공학하고는 아무런 관련 없는 막걸리 술에서 어떤 유기체를 당장에 생각했을지라도, 그가 속한 사회에서 살아있는 생명 유기체인 자기를 연구해 볼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을 깨닫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다. 그는 지금 굴절되어 투영된 자화상을 잠시 숨 고르며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났으니, 모두가 바라던 대로 자기 신장(伸張)이 되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렇게 되지 못하니 바라는 당사자나 마음속으로나마 빚을 지고 있는 의원은 오죽 하랴 싶지만, 뜻대로만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사인 듯, 하여서 한 발 뒤 쳐진 내가 보는 앞사람들의 거동이 무척 안쓰럽게 보이는데, 의원의 처남이 그중 한사람이다.
‘이 아무개’는 부산에서 일자리를 정리하고 내려와 의원이 된 인척을 도와서 모든 힘을 다해 뛰었지만 역시 취직 순위는 까마득히 멀기만 하다. 그러니 아직은 셋집 단칸방에서 조무래기 자녀들과 내외며, 모두 일곱 식구가 북적대면서도 벌이는 한 푼 없으니, 가장으로써 속이 타는 살림 고비를 한두 번 넘기는 게 아니리라. 선거철이야 어떻게 자금줄을 일부나마 쥐고 있었을 터여서, 그럭저럭 연명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해서 술도가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이유를 차마 나에게까지 털어놓을 수 없어서, 그냥 또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으니, 낌새를 알아서 내가 헤아릴 수밖에 없다.
술에 취한 ‘아무개’형의 거동이 산만하고 불안하다. 뒤 안의 변소에 다녀오는 척하면서 나뭇가리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 돌아온 ‘아무개’ 형에게 내가 먼저 말했다. ‘댁에 땔감이 없지요?’ 그는 반색하며 후속 반응을 기다린다. ‘많이는 안 되고 내가 자전거에 짊을 수 있을 만큼만 밤에 가져 가리다.’ 이 말 한마디에 그는 평생 잊지 못하고 간직할 것처럼 감회 어린 눈을 하여 한참을 눈뜨지 않고 있다.
눈시울은 작은 경련을 일으킨다. 모름지기 양식도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 힘을 알고 또 곡물을 밖으로 내는 일은 상당한 부담을 느꼈든지 그는 일체 함구한다. 모름지기 식량 살 돈은 누님에게 부탁했을 것이지만 술을 먹는 동생의 버릇을 아는 누나가 시장에서 바로 쌀로 배달시켰는지도 모른다. 차마 나무까지 손을 벌릴 수 없었으리라.
그날 밤 서툰 솜씨를 내어 야밤 방문을 했다.
들어 얹힌 사랑채의 끝은 높이 매달려 있고 그 아래 한뎃부엌에 있는 여식(女息)들은 자매를 구별할 수 없게 졸망졸망한데도 아직 겨울나기 옷을 입지 못하고 있다. 부인의 출중한 미모가 겸손과 어우러진 한밤의 문밖 짧은 인사 시간이었음에도 곳 터질 절규를 참고 있는 듯, 소리 내어 울며 숨어버릴 듯, 무언으로 인생의 무상을 말하고 있다. 뒤웅박 여인의 신세인가, 팔자 드센 미인의 신세인가? 뒤웅박 신세라면 아직은 때가 덜 차고, 팔자 탓이라면 때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기 업(業)인 것을!
돌아오는 길에서, 아직은 그림도 없는 나의 배우자가 될 사람을 상상해 본다. 저렇게 사는 것이 삶인가? 저렇게 살아도 행복할 것인가? 모처럼 한가한 나만의 생각에 골똘하다.
잘난 사람의 삶은 외견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내면의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들은 이 내면의 삶을 충실히 함으로써 외향을 희생하는지도 모른다. 희생이 아니라 내면의 삶을 위한 보호막일 수도 있다.
이들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의 한 단면을 순간적으로나마 망막에 담았다. 오래 간직함으로써 훗날 내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외향적 삶과 내향적 삶을 넘나들며, 조절하고 싶다.
이로써 난 또 하나의 인생 공부하는 셈이다. ‘아무개'형은 이 시간 아직도 거리를 방황하며 나처럼 애꿎은 별만 바라보고 있을지, 아니지!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