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

외통궤적 2008. 8. 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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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3.020308 혼례

발을 뻗어 누우면 문지방에 닿아 발끝을 오므려야 하고 팔을 뻗어 올리면 바람벽에 부딪쳐서 팔꿈치를 접어야한다.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 두꺼운 요와 주체 못할 크기의 이불이 깔린 방은 침구로 가득하여 앉아있는 내가 구름 위에 얹힌 듯하다. 그러다가 위를 올려보니 천장은 어느새 나와 맞닿을 듯 낮아져서 아늑한 태반 속에 들어있는 있는 듯 황홀해진다.

 

 

옆방에선 아직도 젓가락 장단이 그치지 않고 왁자하다. 기쁘다. 하지만 한편으로 친구에게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인데, 무슨 말 한 마디 할 기회도 없이 어떻게 보냈는지 짐작이 안 가고, 옆방에서 들리는 노래 가락마저도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취기를 앗아가고 있다.

 

친구는 어떻게 갔는지, 내 편에 하나밖에 없는 친구는 이 꼴을 숨김없이 의원 댁에 전할 것이고 그 댁에선 ‘몹쓸 것, 그렇게도 몸부림치더니 고작 그렇게 하느냐’ 며 비웃을 것 같은, 이런 저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산중턱에 있는 삼 칸 ‘루핑’지붕의 바라크 집은 그 터전만으로도 나로선 부러운 집이다. 허나 내 지난 발자취와 정서로는 대견할지라도, 생각하며 몸부림쳐도 넘볼 수 없는 고향집과 부모형제와 일가친척에 대한 그리움의 크기에 눌려 한없이 초라한 집으로 작아진다.

 

이 초라하고 작은 집의 한 방이 내 일생의 첫날의 신방이 될 것을 우리부모는 상상이나 하셨을까? 또다시 정신이 초롱초롱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에이꼬’는 말이 없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장모님께 섭섭하다. 무엇 때문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아마도 혼수의 미흡함이리라. 내가 ‘에이꼬’에게 준 돈의 기준에도 못 미침을 눈치 채고 가슴을 앓는지 모르겠다.

 

 

노래 소리는 처남과 그 친구들의 소리다. 이미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술에 약한 내 얼굴이 쉬 붉어짐을 핑계로 술자리를 빠져나와 이렇게 독백함이 오히려 내 처지에 걸 맞는다. 얼떨결에 보낸 오늘 하루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결혼식이 여기 ‘염주동’ 산중턱의 삼 칸 절간에서 이루어졌다. 신랑신부양쪽 친구 둘씩과 신부의 형제가 고작인 결혼식을 올렸으니 천지신명은 굽어 살피셨을 테다. 정화수를 가운데 두고 상견하는 둘의 사이에 버텨 앉은 본존의 이마에 아침햇살이 비치고 그 황금빛이 우리 둘의 볼을 달구고 있었다.

 

서양문물이 밀려든 남도(南都)에서 유행을 뛰어넘는 이 파격적 혼례식은 온전히 순수의 극치인 것을 자부해도 될 성싶다. 지난날에도, 지금도, 앞날에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결혼식의 주인공이 여기 있다. 나는 양복을 입고 ‘에이꼬’는 현대식 예복을 입고, 본존(本尊) 이마의 반사광과 아우른 우리 둘의 이마를 튀기는 아침 햇살이 찍힌 혼례사진은 영원의 새김이기에 과거의 내 모든 것을 말하리라!

 

 

비탈길의 얼어붙은 개숫물이 사람의 때를 깨끗하게 씻은 듯 반짝이며 눈을 부신다. 성냥갑 같은 집들이 눈 아래 펼쳐지고, 가득 차 오른 바닷물이 섬 같은 화물선을 떠받치고 태양을 맞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제가 시작인가 싶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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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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