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

외통궤적 2008. 8. 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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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4.020325 신행

이불보따리를 진 지게꾼은 ‘대신동’의 ‘천일버스’ 종점에 이미 닿아 있었다. 내가 스스로 매사를 처리하기엔 오늘만은 좀 어색한 날이지만 그래도 앞장 설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기막힌 신행(新行) 길이다.

 

표도 내가 끊고 자리도 내가 잡아야하고 이불 짐도 내가 챙겨야한다. 이러니 내가 지금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 신행길인지 신혼여행길인지 아니면 내 고향길인지 알쏭달쏭한 버스길로 되어 버린다.

 

 

장모님도 함께 가시니 신행은 아니고, 이불보다리를 들고 가니 신혼여행은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장모님과 함께 고향 길에 오를 리도 없으니 이 길은 어정쩡한 나만의 길, 내 식의 인생길인 셈이다.

 

 

자동차소리로 새벽이 열리면서 뱃고동소리가 항구의 하루를 알리는데, 자동차 경음과 뱃고동이 함께 ‘용두산’ 봉우리를 때리면 아침 해는 은빛의 바닷물을 도시에 퍼붓는다.

 

온통 들끓는 도시의 아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약동의 힘을 그 안에 안고 있다. 나도 고동을 울려본다.

 

 

포로가 되어 부산항을 떠난 나, 한국군의 훈련을 마치고 명태가 되어서 부산으로 들어오던 나, 이제 아내를 맞아 어엿한 가장으로 단칸 보금자리를 틀려고 털털이 버스를 타고 있는 나, 나는 이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 허물을 벗고 있는 것이다. 묵고 찌든 때를 벗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과거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허물벗기 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도시건물을 차창 뒤로 흘러 보내며 눈을 어지럽히더니 이윽고 시내를 벗어나서 먼지를 일으키며, 서북쪽으로 나를 나르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먼지가 차창에 뽀얗게 붙어 시야를 가릴 무렵, 차장아가씨가 차표조사를 시작했는지 운전기사가 연신 거울을 올려보며 흘끔거린다.

 

이불 짐 값을 따로 달랠까 싶어서 신경이 쓰이지만 아랑곳없고, 벗어놓은 신발이 앞으로 밀려가서 그 신발을 잡으려고 머리를 숙이고 팔을 뻗고 있을 바로 그때, 내 옆자리의 ‘에이꼬’가 갖고 있는 표를 보이고 확인 받을 참인데도 차장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 무어라 말하는데도 ‘에이고’는 아무 반응이 없다.

 

 

석 장의 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에이꼬’가 내민 표를 보던 차장아가씨는 ‘한 분은?’ 하고 물었는데 성급한 장모님은 턱을 내밀면서 비껴서 앞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나를 가리켰다. ‘이 할아버지요?’ 차장의 물음에, 장모님은 큰소리로 ‘뭐야?’ 하며 대들다시피 했다. 차안은 잠시 조용했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차장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결혼 하루만의 사위가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니, 이런 사위를 보는 장모님의 심경이 어떠했을까싶어서 나 또한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에 염색을 하기로 다지고 또 다졌다.  허울을 쓰기로 했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도 좋다. 이제부터 나는 내면의 허울을 벗었지만 또 다른 외양의 허울은 다시 쓰고 살아가야 하는, 엇갈린 교차점의 오늘하루를 분기점으로 시작하여 평생을 벌려 살다가 언젠가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여 내면의 허울도 외양의 허울도 다 벗어 던지고 나대로, 벌거벗은 나대로 살날이 올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 때가 언제이고 그 자리가 어디일지 아직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 따지자면 그 날을 위해서 오늘이 있는지도 모른다.

 

 

장모님의 시선이 내 뒤꼭지에 닿아서 근질거린다. 내남없이 먼지라도 하얗게 뒤집어써서 비슷한 흰머리가 됐으면 싶다.  이러는 사이에, 버스는 낙동강 다리 위를 지나며 털거덕 소리를 조용히 잠재우고 낮은 폭발음을 내면서 하얀 모래사장 위를 달리고 있다.

 

 

강물은 푸르디푸르다.  하얀 머리를 푸른 강물에 씻어내는 내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 사라졌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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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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