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보따리 진 지게꾼은 ‘대신동’의 ‘천일버스’ 종점에 이미 닿아 있었다. 내가 스스로 매사를 처리하기엔 오늘만은 좀 어색한 날이지만 그래도 앞설 수밖에 없는 처지이니 기막힌 신행(新行) 길이다.
표도 내가 사고 자리도 내가 잡아야 하고 이불 짐도 내가 챙긴다. 버스를 타고 가는 곳은 신행 길인지, 신혼 여행길인지, 아니면 내 고향길인지, 알쏭달쏭한 버스 길이다. 장모님도 함께 가시니 신행은 아니고, 이불 보따리를 들고 가니 신혼여행은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장모님과 함께 고향길에 오를 리도 없으니 이 길은 어정쩡한 나만의 길, 내 식의 길인 셈이다.
도심의 새벽이 자동차 소리로 열리면서 뱃고동 소리가 항구의 하루를 알린다. 자동차 경음과 뱃고동이 함께 ‘용두산’ 봉우리를 때리면 아침 해는 은빛의 바닷물을 시내에 퍼붓는다. 온통 들끓는 도시의 아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을 것 같은, 약동의 힘을 그 안에 안고 있다. 나도 고동을 울린다.
포로가 되어 부산항을 떠난 나, 한국군의 훈련을 마치고 명태가 되어서 부산으로 들어오든 나, 이제 아내를 맞아 어엿한 가장으로 단칸 보금자리를 틀려고 털털이 버스를 타고 있는 나, 난 이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 허물을 벗는 것이다. 묵고 찌든 때를 벗는 것이다.
사람을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과거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허물벗기인지도 모른다.
버스는 도시건물을 차창 뒤로 흘려보내며 눈을 어지럽히더니 이윽고 시내를 벗어나고, 먼지를 일으키며 서북쪽으로 날 나르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먼지가 차창에 뽀얗게 붙어 시야를 가릴 무렵, 차장 아가씨가 차표 조사를 시작했는지 운전기사가 연신 거울을 올려보며 흘끔거린다. 이불 짐값을 따로 달랠 것 같아 신경이 쓰이는데, 벗어놓은 신발이 앞으로 밀려가기에 그 신발을 잡으려고 머리를 숙이고 팔을 뻗고 있던 바로 그때, 내 옆자리의 ‘에이꼬’가 갖고 있던 승차표를 보이고 확인받을 참이다. 차장의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하고, ‘에이고’는 반응이 없다.
승차표 3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충격적 일이 벌어졌다.
‘에이꼬’가 내민 표들을 보던 차장 아가씨는 ‘한 분은?’ 하고 물었는데 성급한 장모님은 턱을 내밀고 비껴서 앞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숙인 날 가리켰다. ‘이 할아버지요?’ 장모님은 큰소리로 ‘뭐야?’ 하며 대들다시피 했다. 차 안은 잠시 조용했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차장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결혼 하루만의 사위가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니, 이런 사위를 보는 장모님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싶어서 나 또한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 머리염색 하기로 다지고 또 다졌다. 허울을 쓰기로 했다. 내가 아닌 내가 되어도 좋다. 난 내면의 허울을 벗었으나 또 다른 외양의 허울은 다시 쓰고 살아가야 하는, 엇갈린 교차점의 오늘 하루를 분기점으로 시작하여 평생을 벌려 살다가 언젠가는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여 내면의 허울도 외양의 허울도 다 벗어 던지고 나대로, 벌거벗은 나대로 살날이 올 것이라고 다짐한다. 그때가 언제이고 그 자리가 어디일지 아직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언젠가는 있을 것이다. 따지자면 그날을 위해서 오늘이 있는지도 모른다.
장모님의 시선이 내 뒤 꼭지에 닿아서 근질거린다. 내남없이 먼지라도 하얗게 뒤집어써서 비슷한 흰머리가 됐으면 싶다.
버스는 낙동강 다리 위를 지나며 덜커덕 소리를 조용히 잠재우고 낮은 폭발음을 내면서 하얀 모래사장 위를 달리고 있다.
강물은 푸르디푸르다. 하얀 머리카락 섞인 검은 머리를 푸른 강물에 씻어내던 내 모습이 한숨에 사라졌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