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외통궤적 2008. 8. 2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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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6.020326 편지

이렇게 우울한 날, 습관적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몇 그루 남지 않은 버드나무 가로수는 선머슴애 머리카락처럼 뻣뻣한 줄기에 잎을 매달아 하늘을 향해서 쳐들어 있다. 그 위에 거미줄 친 듯 전선이 엮여 어수선하게 걸쳐있다. 내려다보이는 버드나무는 줄줄이 잇댄 새까만 기와 골과 어울리지 않게 산만하고 제멋대로여서 내 마음의 갈래보다 더 엉클어져 있다.

버드나무. 봇도랑을 따라가며 뱀처럼 길게 이어진 행렬이 동구 밖의 넓은 들판 한가운데 시원스레 지나가고 있는, 향수의 고향나무다. 버드나무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곳, 고향이다. 가지를 축축 늘인 수양버들은 고향 마을 학교와 샘터를 이끌어 오지만, 눈 아래에 보이는 몽땅한 버드나무가 고향의 수양버들로 슬며시 변한다. 오늘도 버릇이 도졌다.

어릴 때 들었든 노랫말 속에 ‘능수버들 태질하는 창살에 기대어…’ 의 나그네 심사도 떠오른다. 바람에 흔들려서 문살에 메어치는 능수버들 채가 내 가슴을 메어치고 있다. 내게 이렇게도 딱 떨어지게 맞을 수 있는 글귀는 없다. 그 버드나무의 고향 정서가 또 동했다.

둥둥 떠다니다가 슬며시 원초의 무(無)로 돌아가며 소멸하는 나, 이렇게 공허한 때 그래도 파란 연녹색 잎을 내어 하늘거리는 샘가의 수양버들 생각을 일깨워서 창밖의 까까머리 버드나무와 겹치면 고향 그림은 더욱 선명해진다.

툇마루를 짚고 한쪽 팔을 무릎에 대시며 보선 발로 나오시는 할머니의 모습, 한 손으론 무릎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지팡이를 짚은 하얀 쪽 머리가 반짝이는 할머니를 그리면, 난 미치도록 달린다. 일순에. 밖은 물안개를 피우며 빗줄기를 퍼붓는다. 정신을 차렸다. 난 이 빗줄기를 거슬러 하늘을 올려 보다가 차라리, 눈을 감으면서 주먹을 쥔다.



이제 난 이곳에 뿌리가 박혔다. 마치 한 포기 갈대가 뿌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뻗듯이 나도 이제 탐색(探索)의 촉수(觸手)를 뻗어서 넓혀 나가야 한다고 여겨서, 하나의 성취가 새로운 발판이 분명 되리라고 믿었다. 하나,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허무로 되어서 이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이제 난 또 다른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것은 내 생활의 울타리와 터전을 넓히면서 따르는 공간적 결핍의 외로움일 수도 있겠다. 뒤뚱거리면서도 내가 걸을 디딤돌을 딛고 있다. 지금 이 마당에서 새로운 디딤돌을 놓아야 할, 새로운 길에 닥칠 새로운 외로움이랄 수 있다. 이것은 내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정신적 고독의 또 다른 한 면이다.

몸부림은 서서히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다.

기압이 낮으면 기분도 가라앉는 것일까? 몹시도 허전하다. 난 갑자기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있는 감정을 그대로 괘지(罫紙)에 그렸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다. 언론매체에, 내무부 장관에게, 강원도지사께, 속초시장에게, 그리고 ‘이북 오도 민회’에 백방으로 수소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눈앞에 모시고 뚜렷하게 호소하고 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러서 내 앞에 앉히고 물러설 수 없도록 얽어매고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이 여! 여기 천애(天涯) 고아가 핏줄을 찾습니다.’ 난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나를 아는 사람은 이 주소로 연락해 주십시오! 이런 내용의 글 줄기로 한국일보사의 편집진이 꼼짝없이 내 앞에서 승복하여 이 사실을 게재하도록 했다.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외면한다면 영영 당신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내 염원(念願)의 한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하여 미리 생각한다면 외면해도 좋을 것이라는, 절박감 넣기를 잊지 않았다. 읽는 이의 마음을 도려내리라고 마음먹은 것이기에 편지는 장황하기까지 했지만, 몇 장이 되든, 아무도 한 자 한 획을 버릴 수 없도록 내 혼을 담았다. 정성스레 봉투를 쓰고는 모두 등기로 부쳤다.

이렇게 오늘의 우울한 심경을 빗줄기에 태워 하늘로 올려보냈다. 후련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심기는 이미 맑고 푸른 하늘을 보고 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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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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