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궤적 2008. 8. 2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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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5.020326 궤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떤 것인가?  쉰다는 것은 일신을 의탁해서 내맡기고 거기서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곳, 곧 짐승으로 치자면 굴을 생각하게 되고 둥지를 생각하게 되는 그런 사람의 쉼터,  누어서 양발을 뻗고 양팔을 머리위로 올려서 벽에 닿을까 말까한 길이와 서서 팔을 위로 뻗어 닿을까 말까한 높이의 공간이 가장 평안을 줄 수 있을 듯싶다.

 

여기엔 집기와 가구가 이 공간 외로 물러나 있을 것이 전제됨일 것이다. 이공간은 모태 속에서의 안락(安樂)이 녹아서 출생 후에도 잠재되어, 모름지기 세상에서 가장 평안할 것임에 틀림없다.

 

헌데 우리는 이 공간에서 잡다한 일을 함께 하고자하는 인간만의 욕구를 동시에 실현하려는 특유의 욕심 때문에 늘 평안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서 거기서 안락을 찾고자하니 모순된 작태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어떻든 넓은 공간이 있다면 서슴없이 그 넓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불행(?)으로 내겐 그런 기회가 주어져서 그야말로 과분하게 두 칸 방을 얻게 됐지만 그 실 한 칸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으로 덩그렇다.

 

 

굴뚝목 한쪽에 손바닥만 한 앉은뱅이 책상하나, 그것도 서랍이 두 개씩이나 우리형편에 넘치게 딸려있고 칠 냄새를 물씬 풀기는 새것, 그냥 하얀 보자기만을 둘러쓰고 있으니 이것이 나의 마음을 휘젓는다. 게다가 서랍을 열면 무게가 없어 종이장같이 가볍고 헐겁기 그지없으니 더더욱 허허롭다. 그 책상 위에 라디오 하나쯤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은 멀다. 겨우 사발시게 한 개가 이 책상을 치장한 전부다. 그 앉은뱅이책상 옆에 양은으로 된 네모자비 궤가 책상높이만 하게 그 넓이로  반짝이며 가로놓여있는데, 그 위에 이부자리가 놓이고 보를 얹어서 가리고 있다.

 

궤 안엔 우리 집의 가보가 될 결혼반지인 금가락지가 들어있고 새색시의 하나밖에 없는 한복이 들어있다. 한쪽 벽에 가로 나란히 눈높이로 못을 촘촘히 박고는 그 위에 횃대 보를 치니, 그래도 과람한 우리의 아늑한 신방이 되었고 아쉬운 것 없는 완벽한 안락(安樂)처가 되었다.

 

 

이 공간은 일어서면 천장에 손이 닿을듯 누우면 팔을 뻗어서 책상 위의 물그릇을 잡을만하고 서로 등 돌려 옆으로 누우면 오금이 닿을까 말까한 너비로 쌍둥이의 모태(母胎)를 연상시킨다. 가히 낙원에 비길 바 없는 신방이다.

 

 

연탄아궁이가 있는 출입문이자 부엌문인 창호지발린 미닫이문 밖에 돌을 괴어 받친 장난감 같은 찬장엔 밥사발 두개 국 사발 두 개 보시기 두 개 도마와 칼이 덩그렇게 놓여있을 뿐이다.

 

들여다보이는 곳마다 휑하다.  그래도 굶지 않을 주방채비로는 완벽하다. 이를테면 오동나무 베어서 짠 이불장 양복장대신에 손바닥만 한 양은궤짝하나, 회전의자가 딸린 탁자와 책장대신에 앉은뱅이 네다리책상하나, 죽나무 찬장 대신에 소나무판자로 짠 장난감 같은 쥐 막이 그릇 통 하나, 해서 큰살림 세 가지가 고루 갖추어진 셈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다. 그것은 나의 내면의 수평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이리라!

 

긴 세월 자손의 입김이 서리고 집안의 운기가 배어서 검어지고, 한 맺힌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저려서 반짝이는 할머니의 나무함엔 비길 수는 없겠지만 하얗게 반짝이는 작은 양은 궤를 정성스레 간직하여 할머니가 후대에 물리듯 나도 다음 대에 물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 궤는 나의 거울이고 나의 얼이 스밀 것이기 때문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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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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