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떤 것인가.
쉰다는 것은 몸을 의탁해 내맡기고 거기서 평안을 찾을 수 있는 곳, 곧 짐승으로 치자면 굴을 생각하게 되고 둥지를 생각하게 되는, 그런 사람의 쉼터일 테다.
누어서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닿을까 말까, 하는 너비, 팔을 올려서 닿을까 말까, 한 기장이면 될 것이고 높이는 서서 팔을 위로 뻗어 닿을까 말까, 한 높이의 공간이 가장 편안을 줄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엔 집기와 가구가 이 공간 외로 물러나 있을 걸 전제함일 것이다. 이런 공간은 잠재된 모태의 안락(安樂)이 연상되는 것이어서 세상에서 가장 평안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공간에서 잡다한 일을 함께하려는 인간만의 욕구를 동시에 실현코자 하는 특유의 욕심 때문에, 늘 평안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안락을 찾고자 하니 모순된 작태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어떻든 넓은 공간이 있다면 서슴없이 그 넓은 공간을 차지할 것이다.
불행(?)으로 내겐 그런 기회가 주어져서 그야말로 과분하게 두 칸 방을 얻게 됐지만, 그 실 한 칸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공간이다.
굴뚝목 한쪽에 손바닥만 한 앉은뱅이책상 하나, 그것도 서랍이 두 개씩이나 딸리고 칠 냄새가 물씬 나는 새것인데, 그 위에 하얀 보자기를 둘러쓰고 있지만, 서랍을 열면 무게가 없어 종잇장처럼 가볍고 헐겁기 그지없다.
두 쪽 다 아무것도 없다. 그 책상 위에 라디오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사발 시게 하나만이 책상을 치장한 전부다. 그 앉은뱅이책상 옆에 반짝이는 양은으로 된 네 모잡이 궤가 책상 높이만 하게, 그 넓이로 가로놓였다. 그 위에 이부자리가 놓이고 보를 덮어 가리고 있다.
궤 안엔 우리 집의 가보가 될 결혼반지인 금가락지가 들어있고 하나밖에 없는 새색시의 한복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쪽 벽에 가로 나란히 눈높이로 못을 촘촘히 박고는 그 위에 횃대 보를 치니, 우리의 아늑한 신방은 부러움이 없고, 아쉬움도 없는 완벽한 안락처(安樂處)로 되었다.
이 공간은 일어서면 천장에 손이 닿을듯하고 누우면 팔을 뻗어서 책상 위 물그릇을 잡을만하고 서로 등 돌려 옆으로 누우면 오금이 벽에 닿을락 말락 한 너비로 쌍둥이의 모태(母胎)를 연상 한다. 가히 낙원이 따로 없는 신방이다.
연탄아궁이가 있는 출입문이자 부엌문인 창호지 문밖에 돌을 괴어 받친 장난감 같은 찬장이 있다. 밥사발 두 개, 국 사발 두 개, 보시기 두 개, 도마와 칼이 덩그렇게 놓여있을 뿐이다. 들여다보이는 곳마다 휑하다. 그래도 굶지 않을 주방 채비로는 완벽하다. 이를테면 오동나무 베어서 짠 이불장 양복장 대신에 손바닥만 한 양은 궤짝 하나, 회전의자가 딸린 설 책상과 책장 대신에 앉은뱅이 네다리 책상 하나, 죽나무 찬장 대신에 소나무 판자로 짠 장난감 같은 쥐 막이 그릇 통 하나, 해서 큰살림 세 가지가 고루 갖추어진 셈이다.
모든 게 만족스럽다.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다. 그것은 내 내면의 수평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이리라!
긴 세월 자손의 입김이 서리고 집안의 운기가 배어 검어지고, 한 맺힌 할머니의 손때가 절어 반짝이는 나무함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하얗게 반짝이는 작은 양은 궤를 정성스레 간직하여 할머니가 후대에 물리듯 나도 다음 대에 물리려는 의지를 다진다.
이 궤는 나의 거울이고 나의 얼이 스밀 것이기 때문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