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궤적 2008. 8. 30.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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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9.020409 형

형님은 눈앞에 나를 두고도 이 집의 번지와 이 집에 ‘외통’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냐고 연거푸 묻고 있다.

나는 단번에 알아보고 형님의 손을 붙들고 방안으로 모셔 들어가려 했으나 막무가내로 버티고서 ‘네가 외통이냐?’고 거듭하여 묻고 있다.

‘그렇습니다. 형님,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팔을 잡아끌어도 소용없다.

형님은 의심쩍은 기색으로 나를 훑어보며 머뭇거린다. 

옛 모습을 찾으려고 애쓰는듯하다가 다시 정색을 하면서 이번에는 우리가 살던 고향의 이웃 분의 이름과 길과 전답과 이웃한 동네의 이름을 묻고는 어김없는 내 대답에 의아심을 누그리면서 조금씩 내가 ‘외통’임을 확신하는 듯 했다.

서서히 움직이더니 내 어깨를 감아 안아 당기면서 왜 이렇게 변했느냐고 글썽인다. 형님은 눈을 감고 천장을 올려 보았다.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깨를 맞대어 안고 한 참을 선 채로 있다가 ‘의심을 해서 미안하다.

내가 들어가서 차츰 말하겠다.

그리고 형님은 움직이셨다.

드디어 형님을, 내 혈육을, 아니 내 부모님을, 방안에 모시게 되었다.

경찰관이 다녀 간지 사흘이 지난 날 아침에 들어 닥친 형이다. 

내 소식을 듣고는 밤을 뜬눈으로, 기차에서도 김천의 여관에서도, 뜬 눈으로 밤을 새고서 새벽버스를 타고 이른 아침에 우리 집을 찾았다.

형님을 찾아달라고 모 신문사에 호소한 내 편지의 내용을 저버리지 않고 게재한 것이 주효했다지만 이런 게재 사실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형님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 했다. 

어느 날,

부대 동료 간부가 ‘자네를 찾는 광고가 났다’는 전갈과 함께 형의 이름이 게재된 신문을 갖고 왔기에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형은 소스라쳤다는 것이다.

대북 특수 부대에 근무하는 형으로선 신변의 안위에 늘 신경을 써야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불쑥 자기를 찾는 광고란 틀림없이 북에서 남파한 간첩임에 틀림없고, 이 간첩은 이미 형의 인적사항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남파됐을 것이란 짐작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정보부’를 통하여 나의 신원을 철저히 조사했으나 그 자료자체로는 의심의 여지는 없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는 것이니 직접 내려가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즉시 출동(?) 해 왔다는 말씀이시다.

형님이름의 가운데 자는 항렬자라서 누구나 알 수 있겠다 치고, 이름 끝 한자는 스물네 획이나 되는, 쉽지 않은 글자인데도 정확히 신문에 게재된 것을 보면 이상하리 만치 적확 (的確) 했고,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웠다는 것이다. 

직접 만나보고 동생인지를 확인해야 하겠고 혹시 남파간첩과 접선되어 있는지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이중 삼중의 보안과 주도면밀한 작전(?)을 알 까닭이 없는 나는 그저 오랜 세월 탓이겠거니 로만 생각했다.

실이 그렇다. 해방 후에 외지에서 돌아오신 형을 잠깐 뵈었지만 형은 곧 ‘고저’읍의 ‘고급 중학교’를 다니다가 원산의 상급학교로 진학했고 나 또한 형이 전학한 뒤에 ‘고저’읍의 ‘고급 중학교’에 들어갔고 육이오학도병으로, 전선으로, 수용소로, 한국군으로 전전하는 세월, 제대 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의 긴 날, 그 격랑의 세월 속에서 완전히 변모한 나를 형인들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형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이니 이미 풍모를 갖춘 때였고 나는 형과 마지막으로 대한 때의 나이가 열 두 세 살을 넘지 않았으니 커 가는 애라서 그 때와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음직하다. 

더군다나 형이 나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는 만남의 시기는 아마도 내가 일 학년이었고 형은 육 학년이었던 일 년간 소학교를 같이 다녔을 시기뿐이니 더욱 그렇다.

그 때의 내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 때의 모습을 그리며 더욱 나를 의심하고 심문(?) 했을 것이다.

한여름 방학 때다. 형님 집에서 점심을 먹고 형과 함께 놀다가 형이 나를 데리고 갈 수 없는 곳에 갈 일이 있었던지 나를 꾀어서 우리 집까지 데리고 가는데, 길목의 밤나무그늘 밑을 걸어갈 즈음 삼베적삼에 실룩이는 내 양어깨를 뒤에서 잡아 뒤로 젖히며 가슴을 펴주든 형!

더 어릴 때다.

소학교에 갓 들어갔을 때에 형은 나를 미끄럼틀 위에 올려주면서 다른 애들과 어울리게 하던 일! 또렷이 새겨있지만 형은 이미 망각의 무덤 속에 묻어 둔지 오래 되었을 테다.

그런데 엉뚱하게 내가 전혀 다른 얼굴로 자기의 동생이라 자처하니 세월의 무심함을 잊은 형은 직업의식이 동했을만도 하다.

자칫, 형제 혈육마저 끊어버릴 뻔했던 격랑(激浪)의 세월, 그 파도의 높이가 여기 형제의 상봉으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돌이켜보아, 나는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편지로써 연락하면서 어렴풋이 형이 여기 이 땅에 계신다는 의심스런 소식이나마 듣고 행동한 터여서 얼른 형을 알아보고 진정할 수 있었지만, 형은 내가 이 하늘아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으리라.

나는 곡절 많은 오랜 나날을 북과 남을 질러 지냈다. 이런 나를 보면서, 나보다 늦게 남쪽으로 나온 형은 나에 관하여 하고 싶은 말을 참아 꺼내기 주저하며 삼간다.

우리 어머니가 애절히 기다리던 나를, 형은 운앞에 보면서, 우리 어머니를 그리며, 곧 큰어머니를 그리며, 형은 눈을 감고 침을 삼키다 말을 끊는다. 형의 입을 통해 들리는 얘기에 내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우리 동네가 불바다가 되면서 잿더미로 되었고,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우리 누님도 믿어지지 않는 전염병으로 돌아가시고, 누이동생 희도 죽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일가와 함께 태백산줄기 아래 ‘능월’ 동네 뒤의 산 밑에 굴을 파고 살면서도 아침에 논에 나오시는 우리 어머니, 이런 우리 집 사정과 우리 어머니를 만났던 일을 형님은 울먹이며 토해냈다.

한국군이 우리 동네로 들어왔을 때에 자치활동을 한 연유로 도피생활을 하다 이른 새벽에 양식을 구하려 굴집을 찾아 ‘능월’로 올라가던 중에 공동묘지갈림길 앞 큰길에서 마주쳤다는 어머니, "다른 애들은 다 돌아 왔는데, 우리 '외통'이는 죽은게 틀림없다"고 하시면서 한숨지었다는 어머니, 이 대목에서 나는 머리를 벽에 부닥치고 싶은 강한 통회의 몸부림으로 절규했다.

형은 나를 죽은 것으로 쳤던 것이다. 죽은 나를 가장하여 접선하려는 간첩인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더욱 의심했던 것이다.

형과 나는 밤을 꼬박 하얗게 밝혔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형은 그 날로 귀대해야하는 터에 뜬눈으로 버스 정거장으로 가게 되었고, 가던 참에 내가 이 오지에 머물게 된 동기가 된 의원에게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나는 이로써 천애(天涯)고아신세를 면했다. 돌아서는 내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나도 이 땅에 피붙이가 있다. 

이 얼마나 보람찬 일이냐!

날고 싶다.

만세!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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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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