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2

외통궤적 2008. 8. 30.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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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통신수단인 편지, 그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형님도 혈육을 찾은 보람에 들떴던지 형수를 모시고 이곳, 멀리 거창 골짝까지 내려오신다는 전갈이다. 형수님은 조카 둘을 데리고, 꿈에도 상상 못했든 시숙의 댁으로 간다는데 설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나고 서울에서 자란 형수는 성대한 예식을 올렸을망정 조카 형제를 낳아 다 자라도록 시댁나들이 한번 못했을 뿐 아니라 시집이라고 이름 붙여서 갈 곳이라곤 어느 곳에도 없는, 외로움을 내색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형님의 마음 아픈 곳을 건드릴까 싶어서도 입 밖에 낼 수도 없던 처지었기에, 이번 여행이 얼마나 기쁘랴 싶다. 또 친구들끼리 모여서 모두들 시집 이야기를 할 때 기죽어 지내던 일을 생각해서 한시가 급했을 것이고, 새로 뵐 시동생과 동서가 무척이나 궁금했을 터여서 형님의 공무에 쐐기를 박았을 것이 틀림없다.

 

고무된 참에, 형님은 동생 네 집에 가면 방도 두 개 있으니 걱정 말고 가자는 부채질도 했을 것이다. 내남없이 거적을 치고, 천막집에서, 움집에서 사는 때에 그나마 방 두 칸은 부러울만 하다.

 

 

그런가 하면 ‘에이꼬’는 소풍날 기다리는 애들처럼 들떠있다. 쓸고 낚고 다듬어서 준비를 하건만 이미 집주인은 방 한 칸을 다른 사람에게 세놓은 뒤다.  걱정하는 나를 눈치 챈 ‘에이꼬’의 움직임이 정지됐고 그 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됐다’고한다. 과연 그렇다.  한 집 건너 여관에다가 선금을 주고 오시는 날에 맞추어서 예약을 해놓았으니 만사형통이다.

 

형님과 나는 그 여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 집에서 쉬는 동서간에는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밤새워 문답하고 시숙의 허물을 얘기해서 좋고, 억지춘향이지만 넷이 대 만족일 것이 틀림없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형수님은 부잣집 맏며느리처럼 너그럽고 인자해 보였고, 큰조카 작은조카 모두 머슴애들이라서 끌끌하다. 작은조카는 토실토실 하고 맏이는 의젓하고 어른스럽기까지 하다. 귀공자풍의 맏이가 똑똑하기에 부러움과 함께 내 마음 뿌듯이 가슴 벅차 오른다. 그 밖에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는 만족스런 형님 가정이다.

 

 

우리는 이튿날 일을 접고 해인사에 가서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돈은 생각 밖의 일이고, 털털이 택시 두 대를 부르고 카메라도 빌려서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 나들이가 없는 ‘에이꼬’에겐 어제까지의 나날이 얼마나 지루한 일상이었던지, ‘에이꼬’의 차림이 한복으로 성장되었을 때, 나도 변모된 ‘에이꼬’의 모습에 놀랐다.

 

아마도 형수님의 첫 시숙방문의 복장에 걸 맞는 차림이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에이꼬’의 한복나들이가 이번이 처음인 것을 생각하면 적이 미안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야 굴러다니는 외톨이 떠돌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에이꼬’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시댁나들이 한번 할 수 없었던 것일까? 생각하면 ‘에이꼬’에 대한 동정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우리 형제 일가의 나들이에 오월의 신록은 너울너울 춤추었다. 골짝을 휘 집고 흘러온 강물도 우리가 지나는 ‘대야리’ 여울목에 이르러서 비늘같이 반짝였다.

 

차를 자주 타지 않는 ‘에이꼬’의 일상이었으니 오늘의 여행이 호사였나 보다. 우리 모두가 황홀지경을 만끽할 때, ‘에이꼬’에게 악마의 시샘이 우리를 차마보지 못하여 동했는지 아니면 ‘에이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호사이기에 취했는지, 귀족의 행차를 흉내 내는 나들이에 흰 고무신발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에이꼬’는 차멀미를 시작했다. 가다 쉬고, 가다가 토하고, 몇 번의 반복으로 간신히 ‘해인사’에 도착했다.

 

 

벌거벗은 산을 뒤로하면서 아름드리 적송이 울창하게 하늘을 가리는가 하면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이 우리의 마음을 한결 싱그럽게 했다. ‘에이꼬’의 멀미는 씻은 듯이 나았다. 널찍한 방에 앉아서, 녹음 짙은 산수를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흐르는 계곡의 물이 눈 안에 들어온다.

 

집채 같은 바위를 타고 넘으면서 거품을 품고 떨어지는 청옥의 물기둥, 피어오른 물안개가 방을 휘돌아 뺨을 스치고 나갈 때, 우리 모두에게 맑은 산 속의 정취가 상큼하게 배었다. 산 냄새에 취해서 스르르 잠들고 만다.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 형제와 가족은 마냥 즐겁다. 앞지르거나 뒤 처지면서, 절까지 오르내리는 길목에서, 열심히 찍어대는 내 마음은 신령에 비기고픈 욕심조차 인다. 한순간인들 놓칠 수 없다. 언제 다시 만나겠는가 싶어서, 헤어지면 또다시 몇 십 년을 기다릴 것 같아서, 아니 영영 못 볼 것 같아서, 이때까지 허공에 매달렸던 나를 실체적 존재로 인화지에나마 담아서 잃었던 과거를 되찾고 싶어서, 깊게 패인 향수의 골을 한 장 한 장의 사진으로 메워 나가고 있다.

 

 

 

형님은 흑백사진을 정성스레 포장해서 내게 보내왔다. 형은 수없이 많게 인화하여서 부대 친구들에게 자랑함으로써 삶의 맛을 느꼈을 것이고, 스스로 자랑할 만한 나들이라 여겨 간직하고서 더욱 뜨겁고 진지하게 맡은 일을 볼 것이다.

 

 

늘 달려있는 내 얼굴 외에는 과거를 더듬을만한 볼 것이 없던 내게 이 사진으로 하여 이젠 내 삶의 생생한 과거와 이제와 내일이 이어질 것이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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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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