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늘을 두르고 습기를 머금고서야 자라는 이끼를 둥치에 파랗게 둘러친 삼(杉)나무가 무성하다. 삼나무는 아직 빗자국이 완연하게 남아있는 진료실에 이르는 흙길의 양옆에 나란히 버텨 서서 가지를 길게 뻗어 맞잡고 있다. 가을볕마저 가려서 길바닥을 어둡게 칠하고 있다. 삼나무는 바람조차 끌어들여 시원한 가을을 안아 그린다. 호젓한 적십자병원의 마당은 오래전부터 사람의 생명을 가꾸는 터전으로 된 듯, 숲으로 우거져 사람의 발길을 끌고 있다. 구내는 산소 공장인 듯 상큼한 나무 향을 뿜어내어 우리의 허파를 넓히고 있다. 기진한 사람의 단내조차 삭일 듯 생동하는 삼나무다.
걷는 우리의 눈도 시원하다.
시어른이 안 계시는 시집살이를 하는 ‘에이꼬’는 마냥 자유롭고 행복했다.
세월이 가고, 마땅히 누려야 할 어머니로서의 또 다른 행복에 눈을 뜬 이즈음 자주 내 눈치를 보면서 내 마음을 알아보려는 여러 가지 이상한 물음을 던진다. 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거꾸로 당치않은 제안도 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드러내지 못하는 내 심경을 아는지, ‘에이꼬’는 오히려 날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초조해지는 빛이 역력하다.
드디어 행동으로 드러났다.
‘에이꼬’의 외가가 뿌리박은 내(川) 밖의 세 외숙모 중 한 분은 ‘육모초(익모초)'라며 쑥 한 아름을 부엌에 두고 가신다. 뒤늦게 내가 보고 물었을 때 보약이라고만 외마디 퉁명스레 내뱉고 두말없이 챙기든 일이 벌써 지난여름이었다. 나중에 다른 처 외숙모로부터 전해 듣고는 조심스럽게 내가 나섰다. 이대로 내가 모른 척한다면 ‘에이꼬’에겐 그게 더 불안하여 심신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드러내기로 했다. 그리고 병원에 가기를 권유하기에 이르렀다.
나 몰래 이 병원에 한 번 다녀간 ‘에이꼬’는 주위를 한가롭게 관망하고 있다. 나와 함께 찾아서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느긋하다. 팔 흔듦이 부드럽고 원만하다. 몸 전체를 휘저으며 걷는 품은 기분이 좋을 때 늘 하는 걸음걸이다. 보폭도 넓어진다.
의사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면서 서로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호소했고 우리는 자신 있는 대답과 함께 한 달 치 영양제인지 치료제인지 모를 주사약을 받아 나오고 있다. 약은 ‘에이꼬’의 약이다.
난 이날까지 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거부하거나 저주한 적이 없는데, 틀림없이 내 인내심을 저울질하는지도 모르는 ‘주재자(主宰者)’의 섭리를 죽을 때까지 순응하리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는데, 흠이 가는 투약 행위가 아닌지 잠깐 상념에 잠긴다.
‘에이꼬’는 저만치 홀로 걸어가고 있다. 그는 오늘부터 전적으로 약에 대해 신뢰하고 믿음으로 흡수하고 융화해야 하는, 비록 영양제라 하드래도 섭리의 궤를 이탈함이 나처럼 꺼림직하거나 부담이 있을 것 같은데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활보하고 있다. ‘에이꼬’의 각오는 이렇듯 극점을 달리고 있다. 난 여기서 새로이 다짐해야 한다. 여린 ‘에이꼬’의 가슴을 멍들게 해선 안 되겠다고.
난 의료 기구를 장만했다. 간호사가 되어서 매일 한 시간의 에누리도 없이 때맞추어서 근육주사를 놓아주었다. 날렵하고 재치 있게 수습하는 요령도 터득했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진심으로 존중하듯이 주사를 놓을 때마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한없는 고마움에 눈물지었다. 이 정성이 반드시 하늘에 닿아서 내게 보람을 안겨주실 것을 털끝만치의 의심 없이 믿고 있다.
지성이면 감천하리라!
누구나 크건 작건 운기(運氣)를 타고 태어난다지만 멀리 튀겨서 떨어져 나온 한 씨알이 싹을 못 틔우고 그대로 썩는다면 떨어져 나온 씨알은 탄 운기의 명을 못다 하고 말 것인데, 멀리 튀긴 보람을 무엇으로 찾으랴!
멀리 튀긴 씨알인 나는 그 보람을 생을 다하는 어느 고비에서 반드시 찾을 것이다.
적십자병원의 삼나무는 수없이 많은 씨알을 바람에 날렸을 것이고 이끼는 밤낮으로 푸르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데도 나무는 씨알을 챙기려 동동거리질 않는다.
나도 느긋하리라!/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