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

외통궤적 2008. 9. 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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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4.020427 허수아비

유해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셨다. 내(川)밖에 있는 ‘에이꼬’의 외가에서 주무신 처숙부는 장인을 모시는 일정이 움직일 수 없는 큰일이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굵은비를 맞으며 처 외숙 형제내외와 같이 우리 집에 오셨으나, 듣던 바대로 넉넉지 않은 우리살림에 덧붙은 부끄러운 현장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우리 내외는 지난밤을 뜬눈으로 샜다.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지만 집주인인들 당장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없으니 내가 이 물난리를 수습해야 할 형편인데, 딱히 피할 곳도 없지만 유해를 모시고 있으니 비울 수 없는 우리 방, 그렇게 밤새 동동거리며 지새면서도 뾰족한 묘안 또한 내지 못했다.

 

형님이 부쳐준 군용 작업복을 집에서 늘 입고 지내는 내게 갑자기 궁한 티가 하나 덧붙게 생겼으니 난감하다. 참으로, 궁한 티를 더는 내지 않으려 했는데, 또 하나의 녹색 군용품이 방 천장에 팔을 벌리고 매달리게 됐다. 해서 자그만 우리 방은 녹색의 푸른 군수품의 전시장이 되었다. 팔소매 달린 비옷을 쇠가죽 느려 펴듯이 늘리고 네 귀퉁이에 끈을 매어서 천장에 올린 모양은 참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괴기(怪奇)한 모양새가 되었는데, 빗물은 비옷의 솔기를 타고 흐르면서 방바닥 외진 한 귀퉁이에 놓아둔 양푼 위에 청량(淸亮)한 쇠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다.

 

 

하얀 보자기에 싸인 장인은 그 빛으로 천장의 허수아비를 처량하게 바라보며 초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린다. 장인께서는 피어오르는 향을 감싸 안고서 갈아 앉은 빗소리 사이로 장단 고조를 맞추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들으시며 고향에서의 첫 밤을 지내고 계신다. 혼령은 외관을 탓하지 않았고 홀로 초를 태워 눈물로 밤을 보내셨다.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영원히 묻힐 곳 고향에서만은 오직 가장 가까이 있는 한 딸자식으로써 마땅히 감당해야하는 당당한 처지에서 포근히 지내도록 했어야 했는데, 괴기한 모양을 바라보시며 어수선한 하룻밤을 보냈셨을 영령께는 말할 나위 없이 죄스럽다. 그 위에 내가 사는 모습을 보는 살아 계신 이들의 애절하는 마음을 생각하니 내 처지가 무색하여 쥐구멍을 찾는다.

 

 

들이닥친 처가 식구들은 허수아비의 천장 부상(浮上)에 억지로 눈을 피하며 말없이 분향하고서 처마 밑에 줄을 지었다. 정좌하신 처숙은 작은 보따리 속에서 호미모양으로 생긴 작은 면도칼 몇 개를 내놓으면서 고개만 끄덕인다. 아마도 미안하다는 뜻인 가보다. 처숙은 아마도 우리말을 잃고 있었나보다.

 

 

모셔야 하는 산으로 간다. 간간이 뿌리던 비가 멎더니 산허리를 띠 돌린 운무(雲霧)가 짙푸른 산을 성큼 우리 앞에 떠다 놓았다. 고개를 들어 봉우리가 보이는 턱 밑에 ‘에이꼬’의 고모네 밭이 있고, 그 언저리에 장인의 유해를 모신 일행은 우리 집에서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모두 헤어졌다.

 

 

다들 떠나고, 허수아비는 그대로 천장에 매달려 있다. 장마철 날씨에 언제 또 내릴지 모르는 비를 저 비옷 허수아비가 우리를 지켜내고 있으니 나는 허수아비 껍질의 보호를 받고 있는 꼴이다. 천장에 매달린 허수아비 껍질은 책상 위에 달랑 놓인 일회용 면도날을 내려다보며, 면도날 한 뭉치는 매달린 비옷허수아비 껍질을 올려보며 ‘놀이마당 잘 찾아서 용케도 어울렸노라’며 깔깔대고 있는 것이다.

 

비옷은 미국에서 왔고 면도칼은 일본에서 왔으니 둘은 다같이 '하꾸라이'지만 작은 앉은뱅이책상과 걸맞지 않게 한방에 놓여있다. 이 셋은 이승을 떠난 영령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귀를 막고 미닫이 쌍 문을 힘껏 닫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구름사이로 파란 하늘이 뚫렸다. 그 사이로 마음을 날린다.

 

 

한 싯점의 사물, 허수아비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를 바로 바라보는 이의 내적 정서이다. 나는 미래의 궁전을 꿈꾸면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는 허수아비인 나로 보았고, 어쩌면 처숙은 당장의 가난을 이기며 아버지를 모시는 ‘에이꼬’를 천사로 비겨 보았을 것이다. 또 여섯분 처 외숙 내외들은 아직 태기가 없는‘에이꼬’에게 내리는 삼신의 형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고향에 계신 영령들이시여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반드시 살아서 찾아뵈오리다. 그리고 훗날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내 삶을 반추하리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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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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