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츠

외통궤적 2008. 9. 1. 16:40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5445.020429 부츠

신발에 따른 애환이 유달리 많았던 것은 아마도 내 활동범위가 그만큼 좁아서 일상의 자잘한 일들이 크게 매듭지고 충격적으로 기억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유년시절부터 있었든 신발기억과 함께 별나게 점철되는 신발 사건이 오늘도 그 한 매듭을 또 맺고 있다.

 

며칠간의 휴가 내어서 구미 공업 단지 취수장 공사 현장을 빠져나온 나는 대구의 중심 번화가에서 큰 마음 먹고 아내에게 줄 맞춤구두 주문 표를 샀다. 아내를 어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나 홀로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길을 상쾌했다. 아내에게 수 십 번을 권유한 맞춤 신, 시골의 읍, 여기에서 허다한 구둣방을 다 외어도 거절하던 ‘에이꼬’, 구두는 도시에서 맞춰야 한다며 막무가내든 아내, 그런 아내의 성화를 못 이겨서가 아니라 내게 맺힌 사연이 있어서, 나는 이번만은 아내의 의견을 존중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만족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아직은 구두의 허상일 뿐 실물은 아내가 그 곳에 가서 발을 재고 얼만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기뻐하는 아내를 본 내 눈에 물기가 어린다. 언젠가 홀몸일 때의 한 겨울에, 서울을 다녀 온 뒤부터 내 모르는 겨울구두가 내 눈에 띄었다. 구두에 민감한 나는 아내 몰래 밝은 햇빛 아래에서 그 구두를 자세히 보았더니 누군가 신던 헌 구두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모멸감에 머리를 쥐어뜯고 기둥에 박고 싶은, 그런 강한 충동을 느꼈다.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도둑이 되는 심정을 적이 헤아릴만 하다. 이후, 나는 이를 악다물고 세월을 깎아서 구두를 짓기로 했다. 내 특유의 냉정한 본심에 호소해서 눈물을 삼키고 주먹을 바라보며 빈손을 확인이라도 하듯 털어 뿌리쳤다. 나는 아직 구두와는 먼 관계다! 애써서 외어본다. 그리고 살며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아내는 서울을 다녀오면서도 여느 때와 다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일념으로 일하는 내 모습이 아내에게 믿음의 싹을 틔우고 있었으리라. 이 믿음이 헌 구두를 얻어신고도 덤덤히 이겨내는 인동초로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쪽마루 한 쪽 모서리에 얌전하게 모셔진 부츠의 흰 속 털이 내 가슴을 검게 태우고, 솔기가 닳아 회흑색으로 된 검은색 거죽은 내 살가죽을 하얗게 긋는 칼자국이 되어 나를 고문하고 있었다. 부츠는 철 아닌 철에도 그 자리에 있건만 나는 그 부츠의 자리를 옮길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않았다. 이 부츠는 내 마음을 곧게 다지는 인생행로의 이정표였기 때문이다.

 

한 철이 지나고 나서, 넌지시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자기에게 부츠를 준 언니의 고생모습을 되살리더니 수정 같은 눈에 눈물을 괴며 말하였다. ‘언니가 불쌍해!’ 아내는 고생하는 언니의 모습으로 부츠를 바라보고 늘 언니에 대한 기도로 지샜지만, 나는 아내에게 만금의 빚을 진 양, 부츠 속에 갇히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낡은 부츠 속에서 내가 헤어 나오는 날이다. 재고 신고 다듬고 신골 치는, 몇 번의 대구왕래 끝에 아내에 대한 무거운 짐을 벗었다. 아내는 하얀 이를 한동안 감추지 않았다. 살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탓이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기증  (0) 2008.09.02
청산  (0) 2008.09.01
허수아비  (0) 2008.09.01
유해  (0) 2008.09.01
병원  (0) 2008.08.31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