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

외통궤적 2008. 9. 1. 09:01

글 찾기 ( 아래 목록 크릭 또는 왼쪽 분류목록 클릭)

외통궤적 외통인생 외통넋두리 외통프리즘 외통묵상 외통나들이 외통논어
외통인생론노트 외통역인생론 시두례 글두레 고사성어 탈무드 질병과 건강
생로병사비밀 회화그림 사진그래픽 조각조형 음악소리 자연경관 자연현상
영상종합 마술요술 연예체육 사적跡蹟迹 일반자료 생활 컴퓨터
5443.020422 유해

사고무친인 내 삶의 현장에도 주위의 길 흉 사와 더불어 근심과 걱정은 때 없이 밀려오고 그 때마다 내 마음은 먹구름을 피워낸다. 이 고장에 뿌리박은 사람과 다름없이 일상의 인간 부닥침이 냉혹하게 다가오면서, 나를 우울하게 하고 때로는 향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고문하고, 때로는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번민(煩悶)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 문제는 오직 내게만 닥치는 문제니까!’ 이미 다진 각오로써 참지만, 같은 입지의 사람끼리 유유상종 모여서 사는 것도 아닌 마당인데도 나 홀로 외면할 수 없는, 길흉사가 내에는 수시로 밀려온다. 용렬스레 티를 내며 빠질 수도 없고, 남들 속에 의연히 끼어서 ‘곧 나도 이런 일을 당하면서 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당 할 수 있을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내 이중성에 차라리 스스로 위안하고 고무(鼓舞)된다.

 

남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처럼 대할 때, 누군가 내 어머니도 나처럼 이렇게 대해 주리라는 믿음을 싹틔우며, 때로는 남의 할머니를 내 할머니처럼 모실 때 골육의 임종과 안치를 도맡아야 할 종가의 맏이로써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고, 곱게 물들인 창호지를 내 마음의 창에 바른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나, 이 소외감을 달래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하는 심경을 어디다가 토로할 것인가! 뉘우치고 고뇌하고 몸부림 처도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 이 현실을 내 죄의 대가로 묵묵히, 가슴에 안고 인고하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써 가장 수치스런 극점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의식하는 지력(智力)을 상실한 숨죽은 허수아비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골육의 상(喪)을 깡그리 덮어두고 남의 부모 영정에 분향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아무도 헤아리지 않는 나만의 몫이다. 이제까진 그랬다. 또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뚜렷한 명분에서 엄숙히 분향하는 날, 장인의 유해를 맞는 날이니 비로써 나는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분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생전의 모습에서 뵌 일은 없지만 ‘에이꼬’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그 장인을 상면하는 날이다.

 

재일 교포인 ‘에이꼬’의 숙부는 기력이 남아있는 당신의 생전에 형, 곧 나의 장인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오늘 그 뜻을 이루는 엄숙한 날이다.

 

‘에이꼬’의 외가와 처외삼촌 형제들은 모두들 들떠있다.  그들은 해방 전에 헤어진 후 이 십 년 만에 처음 뵙는 살아 계신 처숙부를 돌아가신 장인보다 더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민망하다.  아마도 산 이와 죽은 이의 무대가 다른 것이어서, 산 사람으로서는 분명히 산 사람의 무대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아직 나는 이북에 계신 우리 집 어른들과 형제의 모습을 그나마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인가 싶다. 그것도 불가항력으로 얻어지는 공간적 억지(抑止). 사모의 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억지로 꿰어 맞추어서 자위하고 있는 꼴이다.

 

처숙부의 기골은 장대하다. 미루어 장인의 용모를 짐작하게 하지만 장인은 자그마한 네모 상자에 담겨진 흰 항아리에 그 모습은 감추고 마치 동생을 자기의 영정인양  앞세우고 현해탄을 건너왔다. 사연을 알려주지 않아서 지난 일들을 모른 채 묻고, 다만 나는 만감만 어린다.

 

유해는 우리 방의 작은 앉은뱅이책상 위에 모셔졌다. 나는 눈을 감는다. 연만하신 우리 할머니, 지병으로 고생하시든 아버지, 집안의 모든 일을 떠안고 애간장 태우며 묵묵히 감싸 이어가시는 어머니, 난리 통에 생사조차 모르는 형제와 자매들이 손을 벌리고 내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환상에 빠져서 나는 잠시 주위를 잊었다.

 

나는 언제 처숙부처럼 그 몫을 다할 것인가!? 때 놓친 각성에, 이번엔 심한 자괴감에 주위의 눈을 피한다. /외통-



'외통궤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츠  (0) 2008.09.01
허수아비  (0) 2008.09.01
병원  (0) 2008.08.31
용주골  (0) 2008.08.31
나들이2  (0) 2008.08.30
Posted by 외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