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무친인 내 삶의 현장에도 주위의 길흉사와 더불어 근심과 걱정은 때 없이 밀려오고 그때마다 먹구름이 드리워 온다.
이 고장에 뿌리박은 사람과 다름없이 일상의 부닥침이 냉혹하게 다가오면서, 날 우울하게 하고 때로는 향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고문하고, 때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번민(煩悶)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 문제는 오직 내게만 닥치는 문제니까!’ 이미 다진 각오로써 참지만, 같은 입지의 사람끼리 유유상종 모여서 사는 것도 아닌 마당에 나 홀로 외면할 수 없는, 길흉사가 내겐 수시로 밀려온다. 용렬스럽게 티를 내고 빠질 수도 없고, 남들 속에 의연히 끼어서 ‘곧, 나도 이런 일을 당하면서 이들의 기쁨과 슬픔을 당할 수 있을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넘기는, 내 이중성에 차라리 스스로 위안하고 고무(鼓舞)된다.
남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처럼 대할 때 누군가 북에 계신 내 어머니를 이렇게 대해 주리라는 믿음을 싹틔우며, 때로는 남의 할머니를 내 할머니처럼 모실 때, 골육의 임종과 안치를 도맡아야 할 종가의 맏이로서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고, 곱게 물들인 창호지를 바른다.
고향에서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소외감을 달래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야 하는 심경을 어디다 토로할 것인가! 뉘우치고 고뇌 어린 몸부림도 나뭇잎 하나 움직이지 않는, 이 현실을 내 죄의 대가로 묵묵히 가슴에 안아 인고(忍苦)한다. 어쩌면 인간으로 가장 큰 수치의 극점을 겪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의식하는 지력(智力)을 상실한 숨죽은 허수아비라고 손가락 총, 눈총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골육의 상(喪)을 깡그리 덮어두고 남의 부모 영정에 분향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아무도 헤아리지 않는 나만의 몫이다. 이제까진 그랬다. 또 앞으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또렷한 명분에서 엄숙히 분향하는 날, 장인의 유해를 맞는 날이니 비로써 난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분향을 할 것이다. 비록 생전의 모습으로 뵌 적은 없지만 ‘에이꼬’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그 장인을 상면하는 날이다.
재일 교포인 ‘에이꼬’의 숙부는 기력이 남아있는 생전에 당신의 형, 내 장인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야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오늘 그 뜻을 이루는 엄숙한 날이다.
‘에이꼬’의 외가와 처외삼촌 형제들은 모두 들떠있다. 그들은 해방 전에 헤어진 후 이십 년 만에 처음 뵙는 살아 계신 처숙부를 돌아가신 장인보다 더 기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민망하다. 아마도 산 이와 죽은 이의 무대가 다른 것이어서, 산 사람으로서는 분명히 산 사람의 무대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아직 난 이북에 계신 우리 집 어른들과 형제의 모습을 그나마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싶다. 그것도 불가항력으로 얻어지는 공간적 억지(抑止)로 사모의 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억지로 꿰맞추어서 자위하고 있는 꼴이다.
처숙부의 기골은 장대하다. 미루어 장인의 용모를 짐작하게 하지만 장인은 자그마한 네모 상자에 담긴 흰 항아리에 그 모습을 감추고 마치 동생을 자기의 영정인 양 앞세우고 현해탄(玄海灘)을 건너왔다. 사연을 알려주지 않아서 지난 일들을 모른 채 묻고, 다만 만감만 어린다. 유해는 우리 방의 작은 앉은뱅이책상 위에 모셔졌다.
연만하신 우리 할머니, 지병으로 고생하시든 아버지, 집안의 모든 일을 떠안고 애간장 태우며 묵묵히 감싸 이어가시는 어머니, 난리 통에 생사조차 모르는 형제와 자매들이 손을 벌리고 내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는, 환상에 빠져 난 잠시 주위를 잊었다.
난 언제 처숙부처럼 그 몫을 다할 것인가!? 때 놓친 각성에, 이번엔 심한 자괴감에 주위의 눈을 피한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