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

외통궤적 2008. 8. 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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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1.020412 용주골

형님이 다녀가신 뒤 우리 내외를 어르고 추겨서 색깔을 입히려는 듯 가을은 더 빨리 왔다.

‘에이꼬’와 내가 결혼 전부터 접어서 저만치 얹어 두고 잊어버린 꿈의 신혼여행을 상상으로나마 되살릴 수 있는 가을이다. 이미 포기했었으니 새삼스레 어울리지 않는 신혼여행이지만 뒤늦게나마 그 꿈의 언저리를 맴돌며 더듬을 수 있었다.

형님이 다녀가시던 날, 배웅 길의 버스 정거장에서 있었던 작별 말씀 끝에 던지는 형님의 귀띔 한마디, ‘에이꼬’가 들을세라 나직했지만 내겐 벼락같은 울림이었다. ‘동생 돌아가거든 책상보 밑에 작은 봉투를 챙겨?!’ 형님의 눈동자엔 물기가 어려 있다. 난 다만 ‘형님!?, 아이 형님?!’ 두 마디 말만 하고 고개를 외로 돌렸다. 혈육의 정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온몸에 스미면서 혈육을 찾은 기쁨과 부모를 저버린 통한이 교차 되며 북받쳐 눈물이 고를 터서 흘렀다.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삶의 환희와 참회의 눈물이었다.

형님은 우편으로 운동화를 부쳐주시더니, 통일의 그날에 고향 집에서 이야기보따리와 함께 풀어 놓아야 할 법한 군용코트와 위 아래옷 몇 벌과 비옷을 또 며칠 후에 부쳐왔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군복이지만 질감이 돋보이는 고급 군용품이다.

무언가를 나누고 싶었든 형님이 정이 배어 풍기고 있다. 그 정이 응축되어서, 이번엔 우리 부부를 형님이 사는 경기도 파주 군 ‘용주골’로 불러올리고 있다. 군인 가족의 생활을 소개하고, 부담 없도록 편안히

생각하라시며 찾아오는 길을 그림으로 자상히 그려 보내주셨다.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보람찼으랴! 이웃 동료들에게 자랑하고, 이젠 형수도 형님도 함께 내왕할 수 있는 혈육이 있음이 사실임을 하루라도 빨리 이웃에게 보여주며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출발하는 날을 미리 통지해 주면 모든 준비를 해 놓겠다’라며 단단히 이르는 형님! 입가의 웃음이 여기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눈에 선명히 보인다.

삼 년이 되도록 이루지 못했든 오붓한 여행이다. 아직은 형님께로 가는 길도, 우리의 앞날도, 먼지가 날리는 자갈길이지만 초가을의 한가한 들판은 모든 게 넉넉해 보인다. ‘에이꼬’가 이상(理想)의 집으로 향하는 우리의 앞날과 이 여행길을 겹쳐 흐뭇할 때, 무지개를 탄 ‘에이꼬’와 나, 그 일곱 빛은 멀리서 우리를 이끌고 있다.

딱딱한 의자에 허리를 붙인 자기를 발견하고 좌절하는 그 순간을 맞을까 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에이꼬’는 여전히 창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다.

형은 살아있는 동생을 동료 내외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형은 지금의 형편을 숨기지 않고 동생에게 정표로 보이고 싶었고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모든 군인 가족의 어려운 형편을 보여주면서 나로 하여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 이웃의 동료 군인 가족 내외 세 쌍을 합쳐서 어울렸다.

‘용주골’의 집들은 하나같이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눈과 입과 코 턱인 유리문이랑, 진열장이랑, 앞 벽면은 이마 턱인 간판 넓이보다 작고 낮고 좁다. 머리칼은 보이지 않고, 넓은 이마와 작은 얼굴만이 드나드는, 외국인들의 용모를 은연중 닮고 있다. 간판을 뒤집어쓴 낮은 집들은 옛날 본적이 있는 유랑극단의 비극의 어느 한 장(場)의 거리풍경을 온전히 닮았다. 다만 이면에서 벌어지는 환락의 장이, 나그네인 우리에게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좁은 길은 사람들로 넘쳤다.

전쟁의 회오리로 일어난 돌개바람에 쓸린 온갖 유의 인간이 여기 ‘용주골’에 모여서 지난 것을 묻으려고 맴돌고 있다. 잊어라! 그리고 오늘을 살자! 내일은 내일에 맡기자! ‘용주골’의 밤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우리의 극장 나들이는 심야에 마쳤다.

전쟁을 겪은 우리 삶의 무대인 인간 여정에 함께 뛰어든 우리 부부의 연출에서는 정작 나를 볼 수 없다. 나를 보는 기회를 잃고, 다만 그 무대 속에서 부닥치면서 열심히 맴돌고 있을 뿐이다. 먼 훗날, 황혼(黃昏)에 가서야 객이 되어 우리의 신혼여행을 관조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을 가을비가 촉촉이 적시더니 마침내 ‘에이꼬’의 큰 눈망울에 부연 안개가 낀다. ‘에이꼬’는 눈물을 찍고 불가사의의 나를 조금씩 들여다보고 있다.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던 나를 택한 자신에게 나와 함께 조금씩 넓혀지는 환경과, 친구들에게 이야깃거리가 될 삶의 현장을 체험하는 고마움에, 기쁨이 더하여 출렁이는 격랑의 눈물이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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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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