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갈래의 길에 맞닥트렸을 때 망설임 없이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갈 길이 뚜렷해야 얼른 그 길에 발을 들이고 서슴없이 걸을 수 있다. 하건만 난 망설이고 있으니 아직 뚜렷한 목표가 설정되지 않았나 보다. 목표가 설정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난 일 그 자체에 묻혀있다. 비록 시골의 일터지만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몰두하다 보니 일에 애착심이 생기고 일속에서 자신의 일부, 즉 일의 한 고리로서 이어진 것을 잊고 있었나 보다. 마음과 몸이 헝클어지지 않게 도를 닦는 도인이 된 듯, 나도 모르게 일과 하나가 된 이 일자리가 이렇게 내 속에 들어와 있는 줄 아직은 몰랐었는데, 어느 날 유사한 다른 업체와 합병을 한다는 소문에 내 마음은 산란해지기 시작했다.
몇몇 현물출자자는 자기들의 투자 원금 회수를 위해서 눈을 부릅뜨고 설치며 해체의 합리성을 찾는데, 좁은 바닥에서 보급 부수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채산성을 이유로, 유동성의 부족으로 저들의 돈줄에 바닥이 나서, 새로운 경쟁자를 제압할 수 없는 형편을 이유로 창업 때의 의욕을 저버리고 피차를 원망하며 헐뜯기만 한다.
곡절을 거듭하더니 마침표를 찍었다. 후발 업체인 ‘서경 신문사’는 그 이름대로 넓은 취재원으로 독자의 가려움을 긁어줄 수 있다며, 적어도 그 이름부터가 ‘거창’이라는 좁은 이미지의 제호를 제압했다.
난 평소에 점이나 사주나 운수 같은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지만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신문의 제호가 갖는 인상을 도외시할 수 없음을 혼자 새김질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공간적 이미지를 갖는
‘한국’, ‘서울’, ‘경남’, ‘부산’, ‘진주’, ‘서부 경남’, ‘거창’ 이런 식의 지역적 제호와 궤를 달리한 제호이면 될 텐데 그 점이 아쉽다. 직업과 관련짓는다든지 문화와 관련짓는다든지 또는 어느 기관을 대변한다든지 하는 것은 비록 독자의 확보 면에서는 더 제약될지언정 제호 자체로서 정면으로 충돌하여 패배를 자초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런 것 간과한 창업 초기 발의자 몇 사람의 근시안적 안목에 더 화가 난다. 그렇다고 그 제호가 말하는 그 지역에서만 취재하고 보급 제한되는 것도 아닌데 옹색한 자충(自充)수를 두었다고 생각하니 마땅히 귀결될 결과라고 여기면서도 내 일이 없어지는 데 대한 울분은 삭일 길이 없다.
망해서 노비로 끌려가는 굴종이 싫어서, 어미 치마꼬리 잡고 새 아비 집으로 가는 신세가 실어서, 난 단호하게 거절한다. 내가 싹틔운 나무를 키우지 못하는 주제에 남이 싹틔운 나무를 가꿀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으려니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천부적 부족함을 알기에, 새로운 환경에 영합하지 못할 것 같아서 못 배기겠다.
어쩌면 이런 내 취약한 기질이 지금 쥐고 있는 이 일손을 놓으려 하지 않는, 보수적 행동으로 몰고 가는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든 내가 할 일이 있으면 그에 만족하면 되지 않느냐, 는 생각도 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제호도 언젠가는 한계에 닿는 국지적 이미지이므로 역시 도리질로 끝나고, 난 결국 나름의 새로운 길을 결심한다.
앞으로 또 어떤 난관이 닥칠지 모른다. 고난을 헤쳐가리라는 각오를 굳게 다진다. 남들이 다 한다는, 무에서 유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다진다. 자수성가한다는 것, 왜 나라고 해서 못 할까? 싶다. 그러면서도 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또 한 번 절감하면서 절치부심이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자갈 섞인 좁은 거리를 출자자의 한사람이 공무국 인쇄실에서 너절한 활자를 수레에 싣고 근엄하게 감시하며 어딘가 가고 있다. 그는 자기 몫의 일부분이라도 건지겠다고 눈을 부라리고 빼 내온 활자에서 눈을 떼지 않고 서서히 걸어간다. 유형의 자산은 활자뿐이니 그로선 마땅하다 하겠지만 어쩐지 최초의 사업 의욕에서 많이 엇가고 걸맞지 않다. 다 떠내려간 집터에 남아서 쓰러져 뽑힌 나무뿌리를 동여매고 끌고 가는 것 같은, 설은 몸짓으로 보여 날 서글프게 하고 있다.
하잘것없는 지푸라기라도 그것을 쥐고 노는 어린애에게서 빼앗으면 그 어린애는 놓으려 하지 않는다. 어린이는 가치를 의식하지 않고 단지 저와 일치된 자기 일부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난 어린애인가? 달리, 어른이 짚단을 깔고 앉았다가 그 짚단이 약간의 도움이 된다고 해서 꾸역꾸역 옆에 차고 가는데 아무리 만류해도 막무가내다.
어른은 짚단을 자기 집에서 가져왔다는 그 한 가지 이유에서다.
활자를 가져가는 이는 어른이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