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외통궤적 2008. 9. 2.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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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8.020510 교정

팔월의 태양이 살갗을 뚫고 뼈를 녹일 듯, 땅을 녹일 듯이 빛살을 꽂는다. 열기를 받은 푸성귀는 고개 숙여 축축 늘어져 있다.

마을 밖 도랑 갓에 드문드문 서 있는 버드나무만이 물속에 발을 담그고 열풍을 반겨 숱한 이파리를 팔랑거리며 팔월의 태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방에 우뚝 선 산봉우리는 복사열에 굴절되어 부옇게, 멀리 물러나 굽어 들판을 열어 잠재운다.

내가 선 이곳, 방학을 맞은 ‘초등학교’ 교정엔 인기척조차 없다. 모두 물가와 산으로 숨어버리고 마을과 더불어 텅 비어있다.

매미만 천하를 노래로 다스리다가 뚝 그치는데, 미풍에 이파리 팔랑이며 끊임없이 태양에 손짓하던 버드나무만 그대로 하늘을 향해 솟아 들판의 모든 생물을 굽어보고 우쭐대고 있다.

바람이 끊이고 세상도 고요하다.

이제 막 나무 그늘에 숨으려는 우리를 알아차린 매미가 파드득 날아가니 세상이 숨 죽었다.

그대로 한낮이 멎은 시골의 초등학교 교정엔 죽은 시멘트 가루만 회색으로 남아서, 의미 없이 무더기 져 있다.

나는 죽어있는 모래와 죽어있는 돌가루와 씨름하고 있으니 머지않아서 나도 죽는 것인가? 싶다. 물기가 흐르는 등짝을 재어놓은 벽돌 더미에 기대며 엉덩이를 맨땅에 던지고, 다리를 뻗건만 만상(萬象)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고요는 계속되고 있다. 점심은 아직 닿지 않고, 비스듬히 바라다보이는 교사의 창문은 하나같이 밀봉된 양 닫혀서 나를 더욱 열기로 닳게 한다. 닫힌 유리 창문은 교사의 증축을 위해 빚는 시멘트벽돌을 비웃는 듯 말없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너희들은 무얼 하느냐?

네가 이곳에서 평생을 같이 지낼 것도 아니면서 그 고생을,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한단 말이냐?

나는 대답할 말이 없다.

아니다. 내가 일해야 네 옆에 나란히 덧붙이는 교실에서 친구들이 공부할 수 있지 않니?

그래도 닫힌 유리 창문은 열리지 않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네가 안 하면 이 학교를 짓지 못한다던?

나는 할 말을 잃는다.

내가 자란 곳에 있는 학교의 교사는 기름내 나는 판자 붙임 벽과, 나무 내 물씬 나는 마루를 깔아 발걸음 소리로 날 알리며 남을 알아차리는 마술의 울림이 있는, 정감 어린 교사인데 너는 어째서 사람의 발자국도 삼키고 소리도 먹어 치우는 죽어 빠진 건물로 어린것을 끌어들이려 하느냐?

오히려 내가 반격한다.

그럴라치면, 그런 소리 마소. 그래도 나 때문에 그대가 여기까지 와서 이 모양으로 자성(自省)하지 않소?

딴은 그렇다. 다 옳다.

점심이 왔다. 같이 일하는 꼬마는 투덜거린다. 그 흔한 푸성귀에 겉절이라도 많아야 할 텐데 고작 생선 동아리 한 토막과 짠지나 마른반찬뿐이니 이거 원 밥맛이 나야지? 

내가 들으라는 소린지, 날 보고 앞으론 이렇게 먹어야 한다고 일깨우는지, 아리송한 한마디를 중얼거리면서 보리밥 고봉 한 사발을 대접에다 털어 넣는다. 있는 반찬 두루 털어 넣고 쓱쓱 비벼서 잘도 먹는다.

나는 쪼그린 하루지만, 얘는 즐거운 하루다. 몇 푼의 돈이지만 자기 손으로 번다는 것, 몸만 성하면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 앞으로 이 길로 매진하면 될성부른 것, 모든 게 버드나무 둥치이고, 가지이고, 이파리이다. 세상 모두 자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낮의 뜨거운 햇빛조차 자기 앞을 열광으로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푸성귀의 겉절이 맛을 아직 모르고, 생 푸성귀는 소나 닭이 먹는 것쯤으로 여기니 죽어 삶긴 생선 토막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밥그릇을 다 비우도록 겉절이엔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나는 아직 내 역동의 길목에서 멀리 비껴있나 보다.

잠시 생각해 본다.

충의가 꺾여 역적으로 몰리고 그 일족이 더러는 죽고 더러는 노비로 끌려가서 굴욕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먼 훗날 누군가 바로 이 자리에서 그때의 회포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 그런 사람도 있었으려니….

소슬바람이 다시 분다. 

뜨거운 모래 위를 달리는 개미의 행렬에 매미 소리는 허황한 마른천둥 소리일 뿐이다.

나는 한낮의 고요에서 생명의 약동을 환희로 맞는다. 낮잠은 차라리 사치인 것, 죽은 모래와 돌가루 시멘트를 산 나의 품에 끌어안으련다.

꼬마의 삽질이 햇살을 자른다. 내 물 조로가 열기를 식힌다. 벽돌은 물을 머금어 굳으며 제 명을 늘인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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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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