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目

외통궤적 2008. 9. 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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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0.020523 눈

봄부터 가을까지, ‘건게정’ 보를 넘지 못하고 옆으로 비껴 흐르는 물은 내(川)안의 크고 작은 논배미를 온통 적시고 녹여서 벼이삭을 내고, 낮과 밤의 온갖 이야기를 귀 담았음에도 정화하여 못 들은 체, 말없이 흘러내린다. 큰물줄기로 합치는 여기까지 이르면서 금비(金肥)와 퇴비, 오줌 똥 마다 않고 다 걸러 내고 깨끗한 물이 되어 흐른다. 넓게 자리 잡은 양쪽 둑 저 밑에서 키 작은 갖가지 풀 사이에 숨어서 소리 없이 흐른다. 누가 볼세라!

 

물은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밤낮으로 흐르면서 정화되는데 사람은 어찌하여 갈수록 오염되어 못 믿고 의심하는가? 어이없게 썩어빠지는 인간 군상이다. 해거름에 가서야 조금씩 느끼는 이런 잡다한 것을 바람에 실어 흩는 심경이 씁쓸하다.

 

‘눈’은 시멘트 한 포에 벽돌 몇 장이 나오는지 충분히 알아 본 뒤에 어떤 업자에게 청탁했고 그 현장에서 나를 만났다.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외길에서 만난 꼴이 되어 ‘눈’도 나도 적이 당황했던 건 내가 차마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눈’이 생각하지 못했었고 나 역시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서있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게, 전혀 눈치 못 채게 일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막다른 골에서 요지부동(搖之不動)으로 ‘눈’과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무렴, 내가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고, ‘눈’은 나를 보자마자 ‘눈’ 그 자신이 나와 함께 이런 참담한 처지로 전락하는 눈치로 어정쩡하게 손잡고 놓지 못했다.

 

어떤 할 말도 있을 수 없다.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달리다가 혁명을 맞아 패퇴한 구세력의 잔당이지만 그는 여전히 집이 있고 돈이 있고 뿌리가 깊이 박혔으니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눈’이다. 거기에 비하면 같은 일을 하면서 알맹이 없는 허상을 향해서 매진해온 나는 은신(隱身)의 길을 잃고  삶의 현장에서 적나라하게 부닥치는, 또 다른 모습의 패자다. 얼마나 황당했던지, 곧 그 자리에서 증발하고 싶었다.

 

잠시 후 ‘눈’과 나는 헐거워지는 손아귀를 느끼면서 멋쩍게 손을 풀었다. 정성을 다해 찍어 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마주치는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꼬마와 함께 미친 듯이 손발을 놀렸다. ‘눈’은 말없이 둑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빈 포대(包袋)와 빠져나온 벽돌사이를 번갈아 오갔고 한시도 그사이에서 비껴 눈 떼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정해서 점심을 먹게 했고 ‘눈’도 이 현장에 있는 시멘트 포대와 빈 포대, 판에 올려 진 벽돌뭉치를 내가 모르게 세어놓고 편안히 한 시간을 떠나있었다.

 

꼬마에게 물었다. “얘 ‘꼬마’야!” 나하고 얘기할 시간도 없는데 저렇게 하릴없이 이때까지 쪼그리고 앉아서 무얼 했담?’ 넌지시 물었다. 내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역시 사람을 믿을 수 없었는터라 지켜서 벽돌 수를 확인하고 제작과정을 훑어서 자기의 의심을 풀어야만 직성이 풀어지는, ‘눈’인 것을 재확인했을 때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저주하고 싶었다.

 

‘눈’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이웃한 사람이고 ‘눈’도, 그의 안사람도 나와함께 공동의 배를 타고 대해를 항해하다가 난파했음에도 ‘눈’은 나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 나는그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망을 쓰고 허덕여야 한다.

 

그것은 모순이다. ‘눈’, 그 안에 불신과 배타적 이기심이 꽉 차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날 믿을 수 있다 치더라도 이 일은 눈속임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통념적 성격의 일로 굳게 믿고서,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를 짓지 않고 단지 물건에만 눈을 고정시키는 그릇된 생각을 다져 넣어 이 자리에 온 듯싶다.

 

아니면 오늘 끝맺지 못하고 날을 넘기면 밤새에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모르는데 일을 재촉해야할 요량으로, 하루의 일을 이틀로 늘림으로서 그 허실의 틈을 만들지나 않나 하여 지키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 나는 그의 양같이 순하고 법이 없어도 살 수 있었을 것 같던 ‘눈’의 성품이 전혀 그렇지 않게 보였다. 이는 내 눈에 꺼풀이 씨였던지 아니면 ‘눈’의 눈에 꺼풀이 씨였는지 둘 중에 하나는 틀림없이 꺼풀을 쓴 눈이다.

 

오후에 다시 ‘눈’이 왔다. 그런데 오전에 보든 그 선량한 사람 눈은 보이지 않고 이리같이 보이기도하고 승냥이같이 보이기도 한 ‘눈’이었다. 나를 쫓는 ‘눈’의 눈은 짐승의 눈으로 보였다.

 

저녁 때 둑 밑으로 내려가면서 뒤돌아보니 둑 허리의 좁은 턱 위에는 광목을 깔아놓은 듯 길게 늘어 놓인 벽돌 판이 귀여운 아들같이 보였다. 그러나 ‘눈’으로 하여 더럽혀진 내 마음은 보를 못 넘고  농수로를 따라 조용히 흐러가는, 나처럼 숨은 듯 흘러가는, 물에 내 눈과 귀와 입을 씻고서야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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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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