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쉬었을까 말았을까? 이즈음 달력을 볼 이유가 없고 사정이 전 같지 않아서 날짜를 잊고 지낸다. 온전한 자유인이 된 듯하다. 직장의 연대(連帶)에서 풀려난 헐거움에 마음도 풀렸는지, 내 앞에 다가오는 일에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순하게 응하여 이곳, ‘가북’까지 왔다.
난 무엇이든 손에 넣고 내 몸을 움직이고 싶다. 이 세상의 공기를 들이켜고 이 땅의 흙을 밟고 몸부림치면서 체험하고 싶다. 꿈틀거리며 내 존재 이유를 세상에 보이고 싶다. 그래서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뛰어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끔, 아주 가끔 날 찾게 되는 것, 아마도 내 안에 깊이 박혀 잠자는 의식의 구조를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 머리를 하늘로 향하여 서 있는 나, 알지도 듣지도 못했든 이 고을을 몇 해 전에 한번 거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 학교는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건만 오늘은 또렷이 눈에 들고 있다. 키 높은 버드나무 울타리 속에 나직하고 길게, 엶은 분홍색을 옷을 잎혀서 반듯하다. 이런 교사가 마당 한쪽에 나서서 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내 눈이 시간 따라, 장소 따라,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서 어리둥절하다. 분명 그때는 보지 못했다. 이렇게 내가 의도하는 의식 여하에 따라서 눈도 변할 수 있구나 싶다. 그래서 낮도깨비도 보고, 구렁에도 빠지고, 싸리 빗자루 끌어안고 자기도 하는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한다. 그러면서 여기서 며칠을 머물 생각에 다시금 주위를 살피는 것이다. 나의 어눌한 의식이 온전하게 되돌려질 날은 언제일지 모른다.
난 공부해야 할 시기를 오래전에 놓쳤다. 지금은 어린아이들의 공부방을 지으려는 벽돌을 만들려고 여기까지 흘러온 꼴이다. 되묻는다. 벽돌을 찍으려고 부모를 버리고 형제를 버렸는가? 이 벽돌이 반공(反共)과 어떻게 연결 지어지는가? 내 앞에 서 있는 꼬마 ‘벽돌일꾼’은 내 동생과 어떻게 다른가? 여기‘가북(加北)’은 내가 가야 하는 북쪽 이북(以北)과 어떻게 다른가? 꼬리를 무는 의문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분명한 것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가고 있고 이 길을 벗어나선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던 그 판단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보고 싶을 뿐이다. 잊힌 얼굴들을!
고향에서 중학교 교사를 신축하려는 부지에서 일단의 벽돌공들이 단순한 기구로 신기하게 뽑아내는 벽돌을 바라보며, 저 낱낱의 벽돌이 어떻게 집이 될 것인가를 상상했던 내가 이제는 구체적으로 그 벽돌을 만들고 있으니 만약 그때 바라보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건 전혀 아니다. 지금 나의 거취는 내 본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고 한참 멀게 벌어져 있다. 그렇지만 난 그 벽돌을 만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이것이 나다. 난 어떤 역경에서도 순치(馴致)되는 특질을 타고났는지, 내일을 바라보며 담담히 움직이고 있다.
벌판에서 벽돌 찍는 사람을 본 그때 이후 난 외지에서 공부하느라 내가 다니던 고향 중학교의 교사가 그 벽돌로 어떻게 교실을 품어 안았는지 기어이 보지 못하고 말았다. 또 지금 내가 만드는 이 벽돌 또한 어떤 모양의 예쁜 공부방이 만들어져서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럼 난 학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헛수고하는 바람결에 불과 한 것인지,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로 보아서, 쓸모 있는 인간 구실을 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인지, 적이 궁금하다.
큰골과 작은골로 갈라지는 어귀의 언덕 위에 있는 학교 마당에서 내려다보이는 좁은 골은 산사를 오르내리는 길손의 미투리를 보게 하여 그나마 내 마음을 안아 가라앉히고 있다.
바다와 태백준령 사이에 벌려놓은 넓은 들판을 질러 내린 작은 산줄기 끝에 자리한 ‘매봉산’ 봉우리, 그 밑에 터 잡은 우리 동네는 확 트여서 하늘이 넓어 사람 사람을 흩는가 보다.
아무리 지세(地勢)가 대조되며 나름의 의미가 있어 좋아도, 내가 난 고향은 내가 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 나와 걸맞은 내 본향인 것을 어찌하랴!
면 소재지 ‘가북(加北)’에서 훨씬 더 북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북(以北)’의 우리 고향 ‘염성(溓城)’이다. 난 현실에 순치(馴致)되어 어물거리는 사이에 마음은 또 몸뚱이를 빠져나와 이미 ‘염성’으로 치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