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증

외통궤적 2008. 9. 2.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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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히도 집착했던 일을 훌훌 털고 나니 그동안 걷잡을 수 없이 일렁이든 분노의 파도도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어줍잖은 신문사는 풍비박산이 되어서 없어졌다. 이제부터 쉬지 않고 다른 일을 할 것이다. 무슨 일이 될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내겐 아직 주어지지 않으니 아무 일이나 해야 한다. 일에 몰입하면, 일에 별난 뜻을 부어주면, 그대로 될성부르고 새로운 활기를 찾을 것 같다. 내일을 모르는 오늘이지만 나는 오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긴 세월을 면면히 이어온 내 피가 오늘을 지키고 있으니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끈질긴 생명력을 나는 믿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외딴섬의 흰 바위 모서리를 한 손바닥으로 붙들고 절벽을 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난파선의 조난자로 되어 있었다.

 

찾아올 구원자를 기다리느라 유난히 길고 긴 시간을 보내는 이 아침이다. 아내가 방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팔베개를 하고 있는 식전이다.

 

밖은 벌써 한낮의 장바닥을 이루어 시끄러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밖에는 함께 가려는 사람이 지키고, 무작정 가보면 안다면서 앞장을 서고 있다. 그는 작업복을 입고 챙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따라나서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는 내가 실업자가 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날도 죽이고 세상사도 잊을 겸 오늘하루 구경삼아 따라가’잔다.

 

나는 말없이 응했다. 숨구멍을 틔기 위해서도 어딘가 집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던 차에, 옳거니 싶어서 입은 채로, 신은 채로, 구경 길에 나섰다.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무슨 일인들 못하랴싶고, ‘내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숙명으로 알고 수용하는 나니 외면할 일이란 없다’는 단호한 다짐인데도 내 앞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나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고 있다.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 중노동이다.  번번이 나를 시련(試鍊)하는 것, 돌파하지 않으면 나는 영영 낙오될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깨를 짓누르는 숙명적 짐임을 느꼈다. 이것을 외면한다면 이번엔 다른 기회가 날 피해 갈 것이란 생각에까지 미쳤을 때, 나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일은 모래를 퍼서 시멘트 한 포대와 배합을 이룰 만큼 봉우리를 짓고 그 위에 시멘트 한 포대를 따서 붓고 맨 가루로 두 번 저어 버무리고 난 다음 물을 붓고 다시 두 번을 버무리고 이를 자그만 판때기 위에 놓인 벽돌 다섯 장의 쇠틀에 넣어서 다지고 잘 마감하여 넓은 마당에 차례로 깔아 굳히는 일이다.  그런데 보기엔 그리 어렵진 않지만 허리를 굽히고 펴는 반복된 일을 끊임없이 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이 몹시 소모되었던지 한 시간을 못 견디고 그만 모레더미 위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늘이 노랗게 되면서 지구가 갑자기 돌기 시작했다. ‘자형! 처음이라 꽤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 하면 이골이 나서 이까짓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차돌같이 단단하다. 얼마나 많은 일을 치렀는지 어느새 뼈가 옹이저서 어른의 기골이다.

 

부끄럽지만 어찌 할 수 없는 내 한계다. 모래더미 위가 푹신한 요 위보다 편안하다. 눈을 감고, 별을 한참이나 세었다. 아직은 그늘아래 있으니 그나마, 신선의 옷깃이 하늘거리듯 바람결이 살갗을 간질이며 나를 일깨운다. ‘너 아직 아침을 못 먹었지만 이까짓 일에 좌절한다면 점심은 어디 가서 찾을 것이냐!?’

 

차마 아침을 못 먹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도 없고, 일을 젖히고 밥 먹으러 간다고 팽개칠 처지는 더욱 아니고, 이것도 ‘내 인생 공부이려니’ 하면서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농협 뒷마당은 해가 다 갉아먹고 이제 건물 벽 쪽으로 우리가 앉아서 쉴 만큼 그늘을 남겨놓고 있다.

 

드디어 점심간이 되었다. 점심은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자양제인 것처럼 내 입안과 목 젓과 내 창자를 즐겁게 했다. 남은 오후의 일을 또 하나의 세상 읽는 보람으로 가득히 채워 마감하려한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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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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