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통궤적 2008. 9. 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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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3.020530 밭

남의 집 뒷벽에 이어대어 연장 넣는 작은 창고를 만들어 사용하다보니 벽에 흠을 낼까봐 몹시 조심스레 다가가던, 허구한 날의 조바심도 이젠 삭이게 됐다. 얼굴을 보지 못하게 돌아앉은 집 주인의 등허리를 후벼 긁는 미안한 마음을 면하게 되려는가보다.

 

이즈음은 작은 벽돌 큰 벽돌 할 것 없이 울타리 철망 안에 겹담으로 둘려간다. 안을 넘볼 수 없는 성채가 되었으니 부끄러이 일하는 내 꼴을 오가는 이에게 보이지 않아서 좋긴 하지만 이 성곽이 허물려 팔려나가지 않고 점점 두텁게 쌓여만 가는 한은 벽돌을 계속 만들 이유가 없어서 당혹스럽다.

 

지금이 쉴 때다. 마침 취직이 되었기에, 있는 벽돌은 천더기로 변하면서 내 눈길에서 점점 멀어진다. 처분이 짐이 됐다. 그래서 밭을 일 년을 더 빌리기로 했지만 활용거리가 마땅하질 않다. 언제나 같이 고민은 내 몫이고 결단할 것도 내 맘이고 실행도 내 손발이다.

 

발등이 파묻히도록 모래를 깔아놓아 살 깊은 이 땅은 쪽 뙈기밭이지만 무언가 한 몫을 해낼 것 같다. 게다가 곁에 평지의 넓은 운송통로를 끼고 있으니 무엇이든 쉽사리 채워 넣고 꺼낼 수 있어서 안성맞춤, 놀릴 수 없는 마력의 땅이다.

 

옳다. 땅위에 솟아서 자라는 푸성귀 같은 것은 뭇 사람의 눈길을 못 벗어나서 손을 탈것이고, 땅에 묻혀서 자라는 것은 누구든지 파보지 않는 한 그 충실을 가늠할 수 없기에 유혹에서 벗어나 스쳐지나갈 것이니 땅속에서 클만한 것을 찾아보리라.

 

이렇게 마음먹고 나니 땅 밑에서 크는 것 중에는 고구마, 감자, 무, 당근 따위가 생각나는데, 이것들은 한 철을 자라고 마니 그 해에 하얀 민 뙈기밭이 다시 될 터여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자주 돌볼 수 없는 처지의 나로선 일 년을 커서 결실 하는 것을 골라 심어야한다. 헌데 그런 것 중엔 식용과 약용이 있음직하다. 약용은 내가 남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약용 식물을 제대로 자라도록 보살필 수 없을 것 같아 망설인다.

 

남의 청을 거절 못하는 내 성정을 내가 알기에, 더욱 다년생이기에 포기한다. 결국은 식용으로 잘 알려진 ‘우엉’을 심기로 정했지만 이것도 이년생이라니 망설여진다. 하지만 나는 우엉을 심는 그 해에 거두리라고 획책한다.

 

모든 구상을 멋대로 하면서도 기대와 흥미로 가득하여 일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실패에 대한 우려는 전혀 없다. 우엉의 뿌리를 목적으로 하는 이상 뿌리가 깊이 내리고 크고 살지도록 하는 방법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뿌리를 내리자면 흙이 물러야 할 테고, 우엉이 뿌리를 통해서 제가 자랄 자양 유기물을 섭취할진댄 그 유기물을 깊고 넓게 붓도록 해야 할 것 같고, 위에 깔린 시멘트가루가 묻은 벽돌 부스러기 모래는 저 밑바닥에 깔리도록 깊이 파서 뒤집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 생각에 이르러서야 무릎을 치고 매듭지었다.

 

고랑 양쪽에서 손길이 쉽게 닿을만한 너비로 포지(圃地)를 가르며 골을 파고 돋아진 포지를 한쪽에서부터 삽자루길이가 다하도록 깊게, 층으로 파서 엎었다. 며칠을 끈기 있게, 지게 손에 가로지른 서까래 같은 우엉자루를 그리며, 내 우엉에 한다한 집의 아낙들의 팔과 손이 몰리는 상상의 즐거움에, 힘들지 않게 팠다. 퇴비 거름을 넣으면서 팠으니 땅은 한자나 더 부풀어 올랐다. 뿌리가 숨어서 포근히 자랄 솜 같은 우엉 집이다.

 

나는 또 생각한다.  그래도 비가 오면 땅이 굳어지면서 어린 우엉이 뿌리를 못 내리고 오그라들면 그만큼 덜 자랄 것이란 생각에 미치니 무슨 방편을 내야 할 것 같아서 씨 뿌리기전에 뾰족한 수 찾기를 고심하다가 또 무리수를 두는 고집을 부렸다. 내 팔뚝만한 굵기의 나무 말뚝을 마련하고 해머를 빌려서 밭으로 새벽같이 나갔다.

 

다 자란 우엉 잎이 옆자리 우엉 잎을 갉지 않을 너비로 말뚝을 나란히 여섯 자정도의 깊이로 때려 박아 흔들어 뺀 자리에 부드러운 퇴비를 솔솔 집어넣어 채우고 그 위에 약간의 흙을 덮은 다음 씨를 뿌리고 다시 그 위에 흙을 얹고 짚을 깔았다.

 

농사짓는데 해머가 동원되어 교량공사 다리 발 놓을 때 말뚝 박기처럼 요란하니 오가는 사람마다 눈을 휘둥글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랑곳없는 내가 더 괴이한지 그냥 미친 사람 본 듯 하며 뜬 걸음을 옮긴다.

 

내 품값을 계산하거나 씨알 값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일은 시작부터 없을 것이로되 단지 흙이 생명을 품는 어머니임을 알면서 그 흙 버림은 천리(天理)를 그르치는 것 같아서, 비록 피고 지는 꽃을 보지는 못할지라도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은 근채(根菜)를 우리에게 줄 수 있기에 따지지 않고, 오직 우량품만을 생각하고 미련을 부렸으니 이 일에서만은 그 땅 그 밭에 대해서 미안하지 않다. 또 남의 신방을 엿보는 것 같은 처마 밑에 차린 헛간에서 연장을 들이고 낼 때 나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게 되어서 앞집에도 덜 미안하다.

 

몇 번의 덧거름을 주고 내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어 우엉은 소담하게 자랐고 뿌리는 읍에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석가래 같은 우엉이 무더기로 쌓였다. 이변은 내 일상의 밑바닥에서 들끓는 활력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흔들릴 때 용융(熔融)했다. 그래서 어렵싸리 얇게 형성된 내 이성의 정적피막을 뚫어 분출하며 곧잘 이렇게 일어난다.  그럴 때 난 앞뒤의 분별없다.

 

길은 내가 펴 깐 자리일 수 없다. 그것은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깔아놓은 여러 갈래의 자리 위를 선택해서 골라 딛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다. 나는 그 깔아 놓은 어느 한 길을 비틀거리면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만 있으면 그것으로 대수다.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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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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