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간접세 업무와 씨름하면서 보내고 있다. 세원의 태반이 주세(酒稅)이니 편중된 구성비로 몸살을 앓는 시골에서 세리 생활은 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이즈음 난 비록 보(補) 자의 꼬리를 붙이고 있지만, 긍지를 가지고 고단한 줄 모르고 뛰고 있다. 남보다 열심히 노력하는 빛이 투영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충격적인 일마저 경험하며 세상을 배운다.
언제나 독자적 판단으로 해결하든 습성에 젖어있는 나니, 지금 하는 일이 틀에 짜여 내키지 않고 톱니바퀴 돌아가듯 처리되는 공무라서 비록 그 일이 수월하다 해도, 부품 구실 하는 것 같아서 질색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온통 걸리는데 뿐이다.
이들과 효과적으로 융합하는데 내 고지식한 성품이 따르지 못할뿐더러 겉돌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런 단점을 의도적으로 풀려는 내 노력이 노출되어 오히려 어색한 상황만 만들 것 같아서 또한 주저하니 천성은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아우르고 융합하는 노력이 이렇게 절실하게 요구될 수가 없다. 각성하고 또 각성할 따름이다.
여느 관공서와 다를 바 없는 뜰 녘의 나무숲, 청사의 연륜만큼이나 자라있는 갖가지 수목들은 영욕(榮辱) 얽은 산 증표, 청사와 함께 주인의 뒤바뀜을 지켰음에도 누렇게 뜬 잎 하나 없이 언제나 푸르다.
만난(萬難)을 헤쳐 살면서도 저렇게 늘 푸를 수만 있으면 좋겠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헤치고 출근하든 기분이 새롭든 엊그제 같은, 지난 세월이다.
청초(淸楚)하다.
내 성품과 자질을 간파한 선배 ‘전’ 주사는 언제나 자기 고충을 나로 해서 해결했고 능숙한 곱셈 나눗셈의 주산 실력을 갖추지 못한 주위의 애송이들은 제 일을 슬며시 내게 밀어붙였다. 난 토막 일의 무미(無味)에서 벗어나 일을 통으로 꿰어서 완성하며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갈피를 잡아 알려고 할 뿐 아니라 섭렵하려 한다.
내 출장 근무 외에 남의 내근 일까지를 도맡아 하는 성정을 어찌하랴! 그것이 난 오히려 반갑고 흐뭇하다. 그들이 못하는 일을, 아니, 안 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덤의 즐거움이니 이런 복이 어디 있나 싶다. 일을 떠안는 즐거움은 일을 하는 사람만의 즐거움인 것을, 그들은 필시 모르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늘 즐겁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보다 많이 배웠다. 내가 그들의 어떤 한 부분만을 능가하는 것은 오직 줄기찬 탐독과 탐구의 결과이다. 결코 재사(才士)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폭넓은 지식을 쌓았고 치세의 도량과 경세의 능란함을 자랑하는 나름의 수재들이다.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본다. 콩나물시루에서 다투어 뻗는 대가리의 그 하나인 나, 배움의 무한궤도(無限軌道)를 내 앞에 깔아가면서 굴러온 지난 세월이 되돌아 보인다.
유유상종인지, 내게도 나와 꼭 닮은 후배가 하나 생겼다. 그도 언제나 자기의 신상을 나와 의논했고 내 의견에 따랐다. 출장 가기 전에도, 출장 근무 중에도, 출장 보고를 하는 중에도 나의 의견을 참작하는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부담 없이 했다.
‘곽’ 주사는 이심전심으로 나와 동질성을 넓혀나갔다. 난 그를 후임으로 은연중 점지하고 있다. 곽 주사나 나나 내근은 성격상 걸맞아도 외근은 상 찌푸리는 일이라 기회만 있으면 내근을 자청하는 남다른 성격들이다. 어느 면으로 보면 일의 갈피를 모르면서 덤벙대느니 일의 성격과 내용을, 그 배경과 일이 생겨난 경위를, 처리 과정을, 후속 조치를 맑게 알고 임한다면, 왜곡된 판단과 무리한 처리로 물의를 빚지 않을 것이기에, 후배가 지향하는 바가 온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많은 동료는 그들의 위압에 떠는 수검자나 단속 대상자의 심경은 아랑곳없이 오직 위세와 권위에 도취 되어 만족하며 외근을 선호한다.
지금 내가 겪는 외근의 고통과 내근의 즐거움이 어쩌면 내 운명적 전도의 분기점으로 획 지어질지도 모른다. 순수는 내 본연이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거푸집을 씌우면 그 틀에 곧잘 박혀서 변한다. 원형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또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 이래저래 내가 말살되는 이 세상이다.
선배와 나 그리고 후배, 우리는 성격적 유사성으로 인하여 동질화되면서 남들이 외면하는 힘든 일을 젊음의 열정으로 물려받고 물려주며 이어갈 것이다.
영속(永續)의 시간, 그 어느 한 토막 위에 내 자취가 남아서 늘 푸른 나무와 함께 내 생성의 진가를 이어가길 빈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