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리에 채는 것도 인연이라는 옛 얘기에 맞게 처 이모네 이웃으로 이사(移徙)한 첫 연(緣)에 터전이 마련되고 그 언저리를 맴돌기 이 년 만에 초막(草幕)보다 엄청나게 큰, 기와 삼간집을 겨우 마련 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칠 년 만에 지은 ‘제비집’이다.
골목길을 꼬불꼬불 돌아 끝머리에 깊숙이 박힌 막다른 집이라서 비할 데 없이 아늑하다. 굽이진 미로는 침입자가 중도에 포기할 만치 충분히 길어서 어머니의 아기집 같은 편안한 집이다. 이엉 이은 나직한 돌담이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이라 할 문설주를 밀어 죄고, 얹힌 지붕이 머리에 닿을 듯 낮아 소꿉 같은가 하면, 맞은편에 버텨선 석류나무는 고난의 상징처럼 마디마디 불거져 이 집 나이를 말하며 나를 맞고 있다.
예쁜 텃새가 석류나무 가지에서 깃을 가려 다듬다가 파드득 날아간다. 새는 저 석류나무에 때 없이 오가건만, 우리는 칠 년의 세월이 걸렸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 눈앞에 작은 쪽마루를 드린 안방을 가운데 두고 그 오른쪽엔 아궁이를 마당으로 낸 작은방이 달리고 안방 왼쪽에는 솥 걸린 부엌이 달려있어, 나란한 세 칸이 대문으로 들어가는 나의 눈을 비껴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아늑한 집이다. 난리가 나도 찾아들 수 없는 깊고 깊은 곳에 자리했다. 석류나무에 가린 뒷간이 내 눈길을 붙잡아 고개를 기울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류 알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상쾌한 해우(解憂)의 맛을 볼 것이니 그만하면 족하고, 밤이면 밤대로 멋대로 옹이진 가지에 걸린 둥근 달 속 계수나무 바라보고 취해서 디딘 발 허공에 띄우는 별난 맛이 있어, 그때 그까짓 세상사를 한꺼번에 날릴 테니 이 또한 흠이 아니니라. 석류나무는 내 나무가 되었다.
뒷벽을 트고 처마 밑까지 서너 뼘 늘리고 기둥과 부엌 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고콜’ 같은 벽장을 만들어 어린놈 장난감 수납장을 만드니 십상으로 좋다. 기둥과 대들보와 서까래를 온통 문질러 거무칙칙한 그을림을 베껴내니 나무색으로 드러났다. 흙벽은 그대로 새 벽지로 하얗게 도배하니 또한 분통같이 깨끗하다.
바늘 꽂을 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던 지난날의 절박한 소망 하나가 거뜬히 이루어졌으니 그 생각 새삼 밀려오며 내 마음 한구석을 저민다.
저울로 달 수 없는 평안의 무게, 자로 잴 수 없는 극치의 희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동그란 무지개 속 아늑함이니 나에게는 내 전부를 들어내어도 표현할 수 없는, 우주의 크기에 버금가는 내 둥지이다.
초록색 둥근 갓을 쓴 외등이 접시 같은 무대(舞臺)마당을 비추어 밝히고 방안에 드리운 파란색 꼬마 등이 네 모서리 지켜 모기장 속 아들 녀석 잠재우는 장치 되어, 이제부터 길고 긴 인생 연극 무대의 보잘것없는 주연이 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홀로 선 무대다.
석류나무 뒤에 숨은 광에서 천장에 닿도록 가득히 쌓인 연탄을 보고서야 연극은 금방 현실로 다가와서 텅 빈 마당 한가운데서 삶의 진수를 맛본다. 무대와 객 사이를 오가는 나의 분주한 영육(靈肉)의 활동 영역은 넓은 듯 좁은데, 문밖에 나가면 무변(無邊)의 황무지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하지만, 그래도 발붙일 곳은 점하나 작은 곳, 이곳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 길로 돈벌이 떠나는 주연(主演)은 축약(縮約)된 일장(一場)의 무대에 한 달 후에 오를지 두 달 후에 오를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꼬마는 매달려 바지 가랑 잡고서 석류나무 가지 위에 앉아 예쁘게 깃 다듬는 텃세 한 쌍 가리켜 손짓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재잘거린다. 함께, 조연 ‘에이꼬’의 귀밑까지 올라가는 입술 사이로 옥수수 알처럼 잘 박혀 가지런한, 하얀 이가 드러났다.
만장한 관객의 눈길이 닿지 않는 막후일망정 더 넓은 삶의 무대에서 나의 혼을 갈고 닦으려고 대문을 나선다. 그리하여 또다시 돌아와서 오 촉(燭) 꼬마 등 불빛을 받으며 작은 무대를 현란하게 하련다.
비록 보는 이 하나 없어도!/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