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옷이 가득 찬 손가방을 들고 숙소를 나왔다.
낙동강 건너의 하늘이 높다. 멀게만 보이던 산자락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들녘은 어느새 엷은 황록색으로 물들어 설익은 가을을 훌쩍 옮겨와 코앞에 놓았다.
잘리고 남은 자투리 논과 뭉개진 밭두렁에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낟알이 고개 숙여 무심한 주인을 찾고, 발걸음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렁길이 푸대접의 앙심을 바랭이로 깔아놓았다. 주인 잃은 땅, 곳곳에 수그린 벼 이삭을 조롱하듯 돌피는 이미 씨알을 털어 내고 빳빳이 고개를 치켜올려 으스대고, 두렁에서 자란 들풀이 한껏 제 키를 키워 벼 포기 속을 휘젓고 있다.
공단(工團)으로 둔갑하는 첫 고비에서 돌피가 그 몫을 다하여 무성(茂盛)으로 답하는구나 싶었는데 그럴 리가, 참새 떼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참새는 개벽 이래 처음 당하는 사람들의 행패에 제고장을 먼저 버렸다. 낟알을 지키던 허수아비만이라도 참새의 유산인 논바닥을 지켜야 하련만 도망치는 참새를 따라 허수아비조차 어디론가 숨어버렸구나!
사람이 벌이는 흉사(凶事)를 일찌감치 멀리하려는 미물(微物)의 감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둔한 인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아는 것조차 참새에 못 미치는 건 아닌지 생각하며 자연의 이치를 새기니, 나서는 내 봇짐은 무겁기만 하다.
난 시끄러운 이 고장을 잠시나마 피해서 식구들이 기다리는 조용한 시골로 떠난다. 발길에는 배웅 나올 개구리조차 한 마리 없다. 껍질 벗겨진 땅엔 살이 패고 뼈가 드러나서 골수마저 흩어졌다. 흙모래 바람이 하늘을 덮고 소음은 귀 먹이고 기름 냄새는 코끝을 마비시키는데, 쉬어갈 나무 그루터기 하나 없는, 이곳에 무엇 때문에 머물 것인가 하여 떠난 참새를 동정하면서도 멀리 떠나갔을 참새 떼의 뒤를 쫓지는 못한다.
다만 나대로 잠시 피로를 풀 셈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허수아비 하나 없는 들판을 걸으면서, 풍요와 평화의 땅을 잃고 남부여대(男負女戴) 낙동강 기러기를 따라 ‘연해주’ 벌판으로 이주하는 유랑의 대열에 끼인 착각에, 내 손가방을 내리 본다. 왠지 불안하고 서글프다. 옳게 다듬은 길 한군데 없이 온통 파헤쳐 놓기만 한 여기는, 그래도 나로선, 나를 닮은 내 아들을 무엇으로든 즐겁게 할까, 하여 노심초사 꿈을 가꾸는 고장이기에, 뒤돌아볼 수밖에 없다.
평화와 행복은 소요와 갈등의 앙금이리라!
돌피나 참새는 비록 풀과 날짐승이지만 그것들의 진수(眞髓)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기에 난 더욱 초조하다. 그것들은 언제나 씽씽하게 자라고 거침없이 날아다니는데, 왜 난 어깨가 이렇게 무거운 것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어디서 자고 어떻게 사느냐는 것도 모르면서 마냥 좋아서 사는 그것들이 밉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할 바 없이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 이런 갈등을 이기리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가죽 장화의 끈을 죄어 맨다.
우리는 물건으로 마음을 채울 수밖에 없는 천박한 삶을 기쁨으로 승화하려는, 나름의 수준을 자처하지만, 이런 꾀를 용납하지 않는,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를 그 생물들은 온전하게 알고 있는 것이 경이롭다.
난 지금 아들놈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무언가를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내가 돌피가 아니고 참새가 아니고 더더욱 허수아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크게 먹고 이름난 장난감 점포에 들러서 외제자동차를 사려고 마음먹지만, 마음이 가볍지 못한 것은 아마도 이 양철로 된 고급 승용차가 나완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면서 시작되는 것 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쳐서는 내 능력이 도전받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게 되면서 마음은 더욱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스치는 내 어릴 적 일에, 이제까지의 자동차 생각이 그 괴도를 바꾸어서 굴러간다.
내 어릴 때, 아버지는 내가 청하지도 않은 장난감을 만들어주셨는데, 그것은 지푸라기 도막을 잘라서 한쪽을 조금 쪼개고 또 다른 지푸라기 하나를 길게 쪼개어 양팔을 만들어서 몸통인 먼저 지푸라기에 넣어 얼굴과 모자가 되는 턱인 짧은 지푸라기 모자를 씌우고서, 몸통을 잡고 모은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팔이 아래위로 흔들리면서 춤을 춘다. 지극히 쉽고 간단한 지푸라기 인형이지만 그것으로 하루를 온전히 즐기는, 꿈같은 시절을 생각하면서 과연 자동차를 사다 준다면 그때의 나만큼이나 기뻐할까, 싶어서 부질없는 걱정을 한다.
대구의 번화가에 내렸지만, 지푸라기 인형과 자동으로 굴러가는 철제 장난감 자동차의 무게가 내 양손에서 교묘하게 저울질 됐다. 분명 철제자동차가 지푸라기 허수아비보다 무겁지만 그만큼 아들의 즐거움이 보태질지 싶어서 망설이고 있다. 아들놈의 눈으로 허수아비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잔영(殘影)이란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허수아비 장난감은 흥미 없는 검불일 것이다. 그보다는 흙 싣는 덤프트럭이나 유선형의 승용차가 뚜렷할 것이란 생각에서 승용차를 덥석 집었다.
아들놈이 몇 시간을 굴려 보았는지 모르지만, 하루 만에 장난감 수납장에 입고되고 말았다. 그러고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모할머니 집에서 보던 트럭을 사달란다. 아들의 머리엔 트럭만이 자리잡혀 있을 뿐, 보지도 못한 승용차는 요물(妖物)처럼 비쳤거나 돌덩이로 보였을 것이니 지푸라기 인형의 생동감이 이보다 못하지 않았던 내 어린 시절의 아롱진 꿈이 담긴 지푸라기 인형을 그리며, 그 지푸라기 인형의 내 꿈이라도 잔뜩 실을 장난감 고무 트럭을 다시 살 수밖에 없다.
바랭이풀을 뜯어 깔고 쑥대로 발을 엮어 그늘 지운 그 속에서의 새 떼 흩기란 허공의 꿈길인데, 아직도 버드나무에서 까맣게 떼 지어 날아드는 참새를 깡통을 두들기며 쫓아내면서도 아버지가 전수(傳授)한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다가, 중절모자를 쓰고 팔을 벌려 멀리 논바닥 가운데에 서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내 모습을 아들에게 실어 보이고 싶다.
실없는 생각에 아들보다 내 즐거움이 더했던 며칠이 지났다.
쫓지 않아도 없어진 참새, 바랭이는 무성해도 깔고 앉을 틈이 없는 땅, 키를 넘는 쑥이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 민심, 허수아비가 없는 죽은 땅으로 지푸라기 인형의 모델, 허수아비의 그림자를 더듬어 나선다.
철제자동차를 내동댕이친 아들에게 내 지푸라기 인형처럼, 잊히지 않을 꿈을 심어주려, 오늘도 모래바람을 맞으며 작업화 가죽끈을 들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