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곳

외통인생 2008. 9. 1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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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4.021028 머물 곳

울 안팎을 노랗게 물들인 개나리꽃 사이사이에 섞인 진달래가 개나리꽃에 질 새라 연분홍빛을 흩뿌려서 울타리의 경계(境界) 목 상록수와 한껏 어울리고, 그 양지쪽에는 물기 먹은 풀잎, 녹색 융단이 깔린다. 훈훈한 바람이 감았던 내 눈을 띄웠고, 길게 울리는 차 구동이 내 마음을 흥분시키며 설레게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토요일 오후의 회사 정문을 나와 동서남북을 차례로 향해 그쪽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망설인다. 아래를 내려 보면 파란 풀, 눈을 깔아 비켜서 옆을 보아도 하늘거리는 봄꽃, 부동의 생명체는 그대로 봄을 만끽하고 있건만 고동치는 가슴은 영합하지 못하고 애써 멀리하려고만 한다.

벌써 서울로 가기로 정해 놓았던 그 주말이 다가왔다. 가야지 하면서도 마음을 다잡아 발을 옮길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이끌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엉거주춤한다. 아닌체하지만 짐짓 내 행동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온 나라가 내 집이다. 마음 달리는 허황함도 잠시, 갈 곳 모두가 함께 내 마음을 지그시 눌러 내리면서 어떤 저울에 달아도, 어떻게 저울질해도, 다른 추를 올려놓게 되어 무게는 매양 그게 그거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천애(天涯) 고아는 아니다. 나는 단지 가로막은 휴전선으로 인해서 고아가 된 고아이다. 가지 못해 몸부림치다가 이제는 기억조차 아물거리는 고향이 되어버렸지만 이럴 때는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려니와 혈육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 또한 절실하다. 지금의 내 어려운 상황은 덮어두고, 마땅한 의탁 처가 없어서 맡긴 부산의 아들을 보러 가야 옳은가?

대문을 잠그고 나선 지 어느새 한 달이 되도록 비워 둔 집, 먼지가 치료 앉았을 것이며 우편물은 신문과 함께 어지럽게 집 주위에 흩어있을 내 집, 보아주는 이 없이 버려진 화초들은 소리 없는 절규로 시들어지며 주인을 원망할 그 집, 욕심껏 담아놓고 돌보지 않는 된장 간장은 무심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부글부글 괴어 넘치는 장독대, 눈독을 들이던 밤손님이 온 방을 휘저어 난장판이 되었을 것 같은 대구로 가야 옳은 것인가?

아픈 사람은 아파서 들락거리고, 멀쩡한 사람은 남이 알지 못하는 나름의 사연을 안고서 들락거리고, 자기 순화(純化)를 위해 꼭 찾아야 할 사람을 찾아서 오고 가는, 그 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의 확인 과정을 그 큰 눈을 굴리면서 지켜보다가 못내 고개 돌리며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들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곱씹고 있을 아내에게, 내가 못 한 죗값을 무겁게 안고 다가서야 옳은가?

마음이 요동친다.

비중은 그만그만하다. 어딜 생각해 보아도 반드시 그곳에, 가 있어야 할 내 몸인 것을, 어쩌면 좋으랴! 싶어서 먼 곳 하늘을 당겨보고 그 하늘 아래를 기웃거린다.

아들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이기에 착실히 보살피어야 함에도 부산의 외할머니께 맡긴(錐).

앞으로 이사 갈 집일망정 당장(當場)은 보금자리이기에 먹고 자고 아우를 집인 것을 흉흉한 폐가로 만들 수 없기에 한 번쯤 둘러보아야 하는 무게의 또 다른 추.

가정의 중심권에서 멀어지지 않게 붙들어야 하는 아내의 원심력을 죽이는 데 꼭 필요한 내 얼굴을 보여야 하는 그 추.

어렵사리 이어가는 회사를 지켜야 하는 우리 가정의 살림 샘 줄인 직장의 추.

어느 것 하나 입김으로라도 불어서 가볍게 할 수 없는 추(錘)이기에 그 무게를 가늠키 어려워서 이렇게 하늘을 당겨 마음을 건네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의식이 활동하는 한 또렷한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것은 내 삶에서 시련을 떨쳐버릴 수 없는 근원(根源)적 선택의 결과임을 늘 자각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일은 죽음의 문 앞을 들락거린 나로선 마땅히 겪어야 하는 업(業)으로 여기고 달게 받아 즐거운 고민으로 여겨야 함을 까맣게 잊고 허둥대는 것이다.

주말인 오늘, 발걸음은 당연한 듯 ‘김천’역으로 옮겨가고 매표구 앞에 선 난 선뜻 서울행 기차표를 크게 외쳤다. 이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하자! 다른 세 곳의 일은 일시 정지를 선언하자!

내 몸이 가지 못하는 아들이 있는 부산과 보금자리가 있는 대구는 다음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자! 그리고 그때 가서 지금에 찾은 것처럼 생각하자!

서울행 홈으로 들어오는 열차의 기적소리가 작은 ‘김천’역을 들썩이면서 함께 내 마음을 세 갈래로 찢어서 공중으로 흩는다.

조금 전에 완행이 멈추었을 때, 한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누군가를 배웅하는 것처럼 서성거리다가, 차창에 팔을 걸치고서 작은 시골 역을 구경하는 신사를 응시하더니 기차가 출발하며 자기 앞을 지나는 신사의 팔목에 번개처럼 달려들어 팔목의 시계를 낚아채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그 청년은 몇 겹의 철길을 가로질러서 역 구내의 키 작은 나무울타리를 비호같이 뛰어넘어 멀리 사라졌다.

시계를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필시 나보다 좋은 환경에서 출발한, 장래성이 있는 청년일 텐데 아마도 길을 잘못 들은 것 같다. 시계를 빼앗긴 승객, 그는 내가 탄 기차보다 앞섰지만, 완행이기에 어쩌면 나보다 늦게 목적지에 도착할지 모른다. 머무를 곳 분명한 곳을 향해 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의 한 단면을 체험하면서 추풍령을 넘어갔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털끝만치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심성을 심어준 우리 부모님께 감사하면서, 다행스러운 지금의 내 처지를 백번 천번 환희의 노래로 보답하리라고 생각할 때, 기차는 추풍령을 힘겹게 넘고 있었다./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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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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