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6.020908 발가락
애 아버지라 불리면 쑥스럽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익어 농해서 이제는 아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격려가 담겨있는 듯 기쁨으로 다가오는, 일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엔 몰랐던 내림의 이치와 그 특장(特長)적 물림을 생각해보는 이상한 습관조차 생기는 이즈음이다. 이런 감정이나 생각은 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런 습관이야말로 아마도 삶의 중심에서 내가 다해야하는 몫으로 받아들일만한, 진정한 자기 찾기의 한 울안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누군가가 나를 보고 누구를 닮았다느니 안 닮았다느니 하는 것에 조금도 신경을 쓰질 안았었는데 이제 그 말뜻이 생경했던 어제와 다르게 조금은 알아차릴 것 같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존(自尊)의 본성은 조물주의 은혜로운 표현으로 알고 고맙게 생각해야 할 텐데 이를 망각하고 제 우성(優性)만 앞세우며, 그것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따져서, 기뻐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싶어서 미간을 좁히다가도 남의 일이니 그치고, 가외로 내 안을 들추어본다.
내가보는 뭇사람들의 육신의 물림이나 정신의 내림은 재미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구석구석의 닮은꼴이나 그렇지 않은 데를 그 이유를 따져보는 것에 자못 심각하다가도 어느새 흥미로 이어지는 못된 버릇마저 붙었다.
자식의 머리칼이 곱슬곱슬한데 어버이의 머리칼은 어떤지? 어버이의 귓밥 중에 어느 쪽이 자식의 귓밥과 닮았는지, 자식의 콧날은 왜 오뚝한지, 엄지손가락의 끝마디가 휘어지는지 곧은지, 그렇다면 부모 중 누구의 엄지손가락 끝마디가 그런지, 끝도 없이 많은 부분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이 습성은 아마도 어줍게 들어다본 생물진화에 영향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자아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깊을수록 이런 경향으로 흐르지 않나 싶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즉 나는 이 세상에서 물려받은 내림 외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나라는 자긍심이 나를 영구화함으로써 이 나를 보존하려는 욕구가 분출되어서, 닮은꼴을 선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상충되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에 미친다. 그것은 조물주가 내 수명을 무한으로 늘이면 될 것이란 생각이다.
헌데 여기에도 모순이 내재되어있다. 즉 조물주는 당신계획에 의해서 인간의 무한한 발전을 바라리라고 한다면 적당한 수명으로 나를 있게 하면서 보다 나은 발전적 인간으로 창조하려는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믿어서 내 생각을 접는다. 그래도 내가 오래 있는 가장 큰 보람은 나와 닮은 자식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나마 참을 수밖엔 없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을 예뻐한다.’ 더니 과연 그렇다. 내리사랑은 객관화할 수 없는 개체의 본질인데 여기에 무슨 토가 필요한가? 하물며 내 자식이 나를 닮았나하고 살피는데 누가 탓하고 누가 범접하랴!
내 다섯 발가락 중에 넷째 발가락의 끝이 다른 발가락처럼 둥글고 곧지 않을 뿐 아니라 가운데 발가락 밑으로 깔려 들어가고 또 엄지손가락 첫마디가 부러지듯 꺾였지만 끝마디의 뒤 젖힘 없이 곧은 내림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작심하고 살폈더니 영락없는 내 넷째 발가락이요 내 엄지손가락과 빼 닮은 것을 보고 구들장이 꺼지도록 뛰고 소리쳤다.
환호에 놀란 아들은 뜻 모를 소동에 울음이 터졌고 아내는 나와 함께 아들을 달래면서도 연신 넷째 발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만지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 내 발가락과 손가락이 이상한 것을 이제 처음으로 보고서는 이번에는 자기 손가락과 발가락을 들여다보면서 부자의 이상(異常)으로 변형된 생김새와 다른 자기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확인하고 자기만 소외된 듯 조금은 섭섭해 하는 눈치다.
어쨌든 나는 애비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아득히 먼 선조의 자취를 아들에게서 만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내 발가락과 손가락을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만지작거리셨던 할머니의 손놀림이 아련하다. /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