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아버지라 불리면 쑥스럽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어느새 익어 농해서 이제는 아비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격려가 담겨있어 기쁨으로 다가오는, 일신의 변화를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엔 몰랐던 내림의 이치와 그 특장(特長) 적 물림을 생각해 보는, 이상한 습관조차 생기는 이즈음이다. 이런 감정이나 생각은 전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마도 삶의 중심에서 내가 당해야 하는 몫으로 받아들일 만한, 진정한 나 찾기의 한 울안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 누군가가 날 보고 누구를 닮았다느니 안 닮았다느니 하는 것에 조금도 신경을 써지지를 않았었는데 이제 그 말뜻이 생경했던 어제와 다르게 조금은 알아차릴 것 같다. 누구를 막론하고 자존(自尊)의 본성은 조물주의 은혜로운 표현으로 알고 고맙게 생각해야 할 텐데 이를 망각하고 제 우성(優性)만 앞세우며, 그것도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기준으로만 따져서, 기뻐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인가 싶어서 미간을 좁히다가도 남의 일이니 그치고, 가외로 내 안을 들추어 본다.
내가 보는 뭇사람들의 육신의 물림이나 정신의 내림은 재미있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구석구석의 닮은꼴이나 그렇지 않은 데를 그 이유를 따져보는 것에 자못 심각하다가도 어느새 흥미로 이어지는 못된 버릇마저 붙었다. 자식의 머리칼이 곱슬곱슬한데 어버이의 머리칼은 어떤지? 어버이의 귓밥 중에 어느 쪽이 자식의 귓밥과 닮았는지, 자식의 콧날은 왜 오뚝한지, 엄지손가락의 끝마디가 휘어지는지 곧은지, 그렇다면 부모 중 누구의 엄지손가락 끝마디가 그런지, 끝도 없이 많은 부분에 눈길이 가는 것이다.
이 습성은 아마도 어줍게 들여본 생물진화에 영향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보다는 자아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깊을수록 이런 경향으로 흐르지 않나 싶어서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즉 나는 이 세상에서 물려받은 내림 외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나라는 자긍심이 나를 영구화함으로써 이 나를 보존하려는 욕구가 분출되어서 닮은꼴을 선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엔 또 다른 이유가 상충 되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에 미친다. 그것은 조물주가 내 명을 무한으로 늘이면 될 것이란 생각이다. 한데, 여기에도 모순이 내재 되어 있다. 즉 조물주는 당신 계획에 의해서 인간의 무한한 발전을 바라리라고 한다면 적당한 수명으로 나를 있게 하면서 보다 나은 발전적 인간으로 창조하려는 깊은 뜻이 있으리라고 믿어서 내 생각을 접는다.
그래도 내가 오래 있는 가장 큰 보람은 나와 닮은 자식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나마 참을 수밖엔 없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을 예뻐한다.’더니 과연 그렇다. 내리사랑은 객관화할 수 없는 개체의 본질인데 여기에 무슨 토가 필요한가? 하물며 내 자식이 나를 닮았나 하고 살피는데 누가 탓하고 누가 범접하랴!
내 다섯 발가락 중에 넷째 발가락의 끝이 다른 발가락처럼 둥글고 곧지 않을 뿐 아니라 가운뎃발가락 밑으로 깔려 들어가고 또 엄지손가락 첫마디가 부러지듯 꺾이고 끝마디의 뒤 젖힘 없이 곧은 내림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어느 날 작심하고 살폈더니 영락없는 내 넷째 발가락이요 내 엄지손가락과 빼닮은 것을 보고 구들장이 꺼지도록 뛰고 소리쳤다. 환호에 놀란 아들은 뜻 모를 소동에 울음이 터졌고 아내는 나와 함께 아들을 달래면서도 연신 넷째 발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만지느라 정신을 놓고 있다. 그러면서 나의 발가락과 손가락이 이상한 것을 이제 처음으로 보고서는 이번에는 자기 손가락과 발가락을 들여다보면서 부자의 이상(異常)으로 변형된 생김새와 다른 자기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확인하고 자기만 소외된 듯 조금은 섭섭해하는 눈치다. 어쨌든 난 아버지의 발가락과 손가락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아득히 먼 선조의 자취를 아들에게서 만지고 있다.
어린 시절에 내 발가락과 손가락을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만지작거리셨던 할머니의 손놀림이 아련하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