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도 없다. 왕래하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난 떠나온 동네로 누군가 뒤돌아 걸어가서라도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명쾌한 제안을 하지 못한 채 잠시 멍청이 서 있을 뿐이다. 운송책임을 맡은 차량에 내맡긴다는 의연한 자세로 주위를 둘러보지만, 오리무중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힐 수 없다. 발을 굴러도 소용없다.
세찬 물결에 내 모든 게 떠내려가고, 이미 떠난 가족들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영 주저앉을 것 같다.
물길을 막아 돌리며 뻗은 산, 가파르게 깎아지른 산이 버티어서고 그 발밑에 흐르는 개울을 밀어내고서 겨우 버스가 비켜 다닐 수 있는 자갈길을 내어 영호남을 이은 선심(禪心)을 읽는다.
이따금 돌가루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털털이 버스가 긴 먼지 꼬리를 달고 달려와서 망연자실 서 있는 나의 머리와 옷자락을 흔들고 혼을 빼어갈 뿐이다.
작고 낡은 일제 도요타 트럭은 살림살이를 실은 채 전복(顚覆)의 위기를 한 치(寸) 땅에 남기고 길가에 한발을 꿇어 멈추면서 대구행 차선을 통째로 가로막고 꼬꾸라졌다. 운전사와 조수는 대책 없이 서서 얼굴만 쳐다본다. 왼쪽 앞바퀴가 통째로 빠져서 몸체에 비스듬히 붙어있는 것을 보고 기사와 조수는 입을 벌린 채 그들 생명의 보존에 실감 나지 않는 듯 오히려 안도의 얼굴빛마저 감돈다.
트럭에 탄 사람은 좌석 수대로, 운전기사와 조수 그리고 이삿짐 주인인 나뿐인데 누가 누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노릇, 언제나 치켜세우는 그들의 콧대도 이 일 만큼은 화주(貨主)에게 빗댈 수 없는 결정적 사고이니 날이 가고 밤이 새는 일이 몇 번이 거듭된들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을 그들이 먼저 알고 있기에 더욱 난감했으리라! 운임은 전날에 이미 지급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는 길임을 또한 알았는지 책임 있는 운전사가 걸어서 읍내로 갈 참이다. 다행히 어느 마을에서나마 완행버스를 만나 얻어 탄다면 시간에 보탬이 될 수박엔 없다.
나는 이삿짐의 ‘대구’ 도착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불현듯이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이 사고에 소스라치고는 빠져버린 앞바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바퀴는 ‘암나사’ 네 개가 모두 빠져 없어지고 두 구멍만 ‘볼트’에 붙어있다. 내 가슴은 또다시 철렁 내려앉는다. 하마터면 이삿짐은커녕 불귀의 몸, 원혼만이 대구에 갈 뻔했다. 오른쪽의 낭떠러지로 한 치만 더 갔어도 트럭과 함께 수장 되었을, 이 일을 해결할 곳도 시간도 또한 없다. 어떻게 해야 할 마음도, 내키지 않음은 오직 하나의 뜻, 어서 새집으로 짐을 옮겨가는 일이다. 그 일이 이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까마득히 모르는 내 답답한 심사를 토로할 길 없는 게 더욱 애탈 뿐이다.
이웃과 처 외숙 형제분과 처 이모네 식구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삿짐은 새벽부터 실렸다.
비록 남의 손을 빌려 짓긴 했어도 내 땅에다 내 힘으로 집을 지어 이사하는 우리 내외에게 모두의 치사가 꽃을 피웠는데, 여울지는 물길 ‘대야리’에서 한고비를 맞는 내 행로가 절대 순탄치 않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벌써 대구에 도착했을 시간인 오후 네 시경이나 되어서야 거꾸러진 트럭보다 조금 성해 보이는 트럭 한 대를 몰고 온 기사는 말없이 이삿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점심은 걸렀지만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기사 아저씨는 이런 일도 있나 싶은지 한마디의 변명도 없다. 미안하단 말로는 때울 수 없는, 눈에 빤히 보이는 이 사고를 그는 어이없어했다. 제 실수가 아니라 남의 실수일지라도 기술자 행세하는 자기들의 부끄러운 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들은 짐꾼이고 짐을 지고 가는 이는 사람 대신 기계가 맡았을 뿐, 길 떠나는 행장이나 준비는 사람과 진배없이 챙기고 다져야 하거늘 이를 소홀히 한 자기네 ‘기름 바지’들의 잘못을 너무나 또렷이 알고 있기 때문인지, 집에서 처음 짐 싣기 때와 달리 몸을 부지런히 움직인다.
타이어가 터졌다거나 전기회로가 망가졌다거나 엔진이 고장 났다거나 기름이 없다거나, 하는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도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바퀴가 빠지는 일은 어디에다가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을 내게 들킨 것이니 아마도 이들은 평생을 두고 이 일을 교훈으로 삼아서 들메, 바퀴를 차체에 수나사와 암나사로 동여맬 것이다.
꼬꾸라진 트럭은 그대로 벼려둔 채 조심스레 바뀐 차의 바퀴를 굴렸다.
떠나는 이곳을 몇 해 전 처음 찾을 때 넘던 ‘감악산’이 오른편 하늘을 뚫어 솟아있고 산 밑은 벌써 어둠이 짙게 땅바닥에 깔려있다.
낙동강 수원(水源)인 물줄기를 오른쪽 뒤로 보내면서 점점 벌어지더니 이젠 강줄기가 빠져 사라진 곳도 가늠할 수 없다. 골짝을 옮기고 산허리를 타고 어둠을 뚫고, 트럭은 가볍게 달려간다. 모름지기 기사는 어딘가를 다녀오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이 차는 예정에 없던 일을 하게 되어서 덤의 품삯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통금시간이 다 된 자정께 가족이 초조히 기다리는 ‘대명동’ 집에 들어섰는데 피차 할 말이 너무 많지만, 우선은 짐을 푸는 것이 급하니 입을 꼭 다물고 지친 몸과 허기를 무릅쓴다.
화주도 업자도 악몽 같은 하루를 보냈다.
아늑한 시골의 정경은 사라지고 순박한 사람 위에 군림하듯 위세 떨든 기술자의 근성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사로 인한 불편이 돋으며 내 불안한 도시 생활 걱정은 더해간다.
그러나 난 안도(安堵)한다. 그러고 벌써 몇 번이나 죽음의 길목에서 비껴진 내 끈질긴 삶의 여정에, 한을 품은 부모님과 할머니의 염원이 담기며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믿는다./외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