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외통인생 2008. 9. 2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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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계 난간은 뜨겁게 달아있어 잡을 수가 없다. 계단 폭은 좁디좁아 어깨가 벽에 부딪게 되고, 더욱이 가파르니 무릎을 짚지 않고는 오르기도 쉽지 않다.

막바지 옥상 탑 방을 보여주는 주인아주머니의 눈길이 내 얼굴에 쏟아진다. 말인즉, 달랑 하나만 있는 방이라서 독채 같고 외딴집처럼 되어있으니 시끄럽지 않아 오래 묶는 데는 제격인 방이란다.

하긴 이렇게 올라오기 힘든 곳에 나 말고는 선뜻 승낙할 사람도 있을 것 같지 않은 방인데, 더구나 오뉴월의 땡볕이 내리쬐어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어느 누가 이 방에 든단 말인가? 그런데 오늘 이 집 주인은 살다 보니 별사람 다 있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영업집 안주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이것저것 고르는 절차를 즐기지 않는 내 성품 때문이리라. 해서 군소리 없이 승낙한다. 가릴 처지가 못 되기도 하려니와 회사와 아주 가까운 거리인 이 숙소가 출퇴근하기에 알맞고, 나대로 일을 추어 가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그런 시간을 만들어 줄 것 같아서도 괜찮다. 더구나 시끄럽지 않아서 좋을 것 같고, 뜨거운 한낮에 머물 이유가 없으니 그까짓 여름 햇볕이야 문제 될 것 없겠다 싶어서 망설임 없이 정하고 말았다.

난 지금 나름의 비상 상태임을 자각하길 마지않는다.

이따금 물건을 챙기러 들르려면 찜 통속에 들어가서 얼마나 빨리 나올 수 있겠냐고 생각부터 해야 하는, 안식처가 아니라 고통과 인내를 시험하는 시험장이 되어서 나를 맞는다.

‘너는 이것도 분수에 지나(過濫)치어서!’

과거와 미래를 꿰어 응징의 상궤(常軌)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리는 이 소리를 털고,

‘아니다. 너는 남들이 어떻게 여기든 상관하지 말고 품위를 지켜라! 그러면 그다음은 누군가가 도울 것이다.’

이렇게 바꾸어달라고 호소하고 싶기도 하련만, 난 그럴 수 없다. 설사 내 살점을 에이고 문드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는 할 수 없는 태생이랴 싶어서 더 그렇다. 이것도 분수에 넘친다.

부산의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아들’과 서울의 병원 침대 위에서 독백하고 있을 ‘아내’와 대구의 ‘나간 집’을 번갈아 그리며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발걸음은 어느새 기름 먹어 새까맣게 되어버린 회사의 마당에 닿고, 이 기름 냄새에 비로써 내 정신을 가다듬는다.

모두가 새롭다. 이질감으로 어색하던 여러 날이 지난 지금 동료는 서로의 흉금을 터는 지경에 이르렀다.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인 결정(結晶)이다.



점심때가 되어 회사를 나온 나는 이 집 저 집으로의 홀로 매식(買食) 행보의 처량한 반복을 잇고 있다. 모든 직원이 도시락을 가져오는 것은 어제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닌, 오랜 관행인 듯, 회사 분위기를 나 때문에 흩을 수 없는 작은 고민이 점심때마다 생겼다. 꾀어내려고 하면 그들의 겸양(謙讓)에 난 더욱 난처할 것이고 설혹 간간이 응한다 해도 그들의 먹지 않은 도시락이 집에 돌아간 후에 구차한 변명거리의 실마리가 될 터이니 역시 주저할 이유가 된다.

점심시간의 도시락 먹기가 사는 즐거움의 하나였던 시절이 나도 있었지만, 그와 비교되지 않는 행복이 그 도시락 속에 담겨있을 것 같아 부러운데, 부러움에 홀로 정문을 나서는 내 발꿈치를 무슨 연유로 그렇게 무겁게 끌어내리는지 모르겠다.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행복일 수 있는 가르침을 받는다. 난 도시락의 알뜰함을 커서 체험하지 못했다. 그것이 내 삶의 함축인 것을, 이 점심시간에 음미하게 되는 사고의 확장을 인정한다. 전에는 도시락 같은 건 생각 밖으로 멀리 밀려나 있었다. 한때 인간 최소 공동체인 가정의 울타리에서 멀리 이탈해 있었던 까닭에 그렇고, 또 어느 때는 도시락 같은 건 품팔이꾼이나 차고 다니는 것으로 낮추보기도 했었다. 그것이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굴러 떨어뜨린다는 것을 뒤늦게 깨치고 있다.

도시락은 거기에 담긴 내용이 어떻든 먹는 사람은 도시락을 싼 사람의 손길이 있어 풍부한 자양 섭취가 되어, 흐르는 세상살이 물밑의 자갈로 깔려서 그 물을 맑게 할 것이고, 또 마련하는 사람의 영혼이 맑게 깃들어서 그 물길에서 수조(水藻)로 자라서 흐르는 흙탕물을 걸러낼 것이다. 그러함에도 물 위에 뜨려 하지 않고 물속에 잠겨서 세상 사람들의 눈길에서 떨어지면서도 세상 정화에 없어선 안 될, 그것이 도시락의 진리인데 그 진정한 이치를 모르고 허둥대고 살 수밖에 없는 나다.

곰곰이 도시락의 진가를 음미하고 싶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사이에 일하고 해가 지고 해가 뜨는 사이에 잠자는 순리를 잊는다면 삶의 어느 한 부분은 필경 나 모르게 삭감되겠기에 여관의 옹색한 다락방이나마 마련하고 흐르는 물속의 자갈이 되고 수조가 될 혼탁수의 ‘정화(淨化) 도시락’은 먹지 못할지라도 도시락 먹는 이의 깨끗한 품성을 어떻게든 닮으려는 시늉이 절실한데, 형편조차 되지 않고 내 손으로 하지 못하는 처지마저 덮어야 하는, 뜬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

나를 보는 회사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공중에 떠서 사는지를 굳이 묻진 않아도 서글픈 내 생활에 연민을 가질, 그것 또한 꺼림직하다.

난 이런 생활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삶 중에 그래도 좀 나은 생활임을 그들에게 알릴 이유가 없어 주저할 뿐이다./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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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외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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